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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왕조/왕조의 주역들

비운의 에이스 ‘로보캅’ 최창호

by 특급용병 2025.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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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90년대 초중반의 야구팬이라면 한 번쯤은 이 선수를 따라 해 봤을 것이다. 오른발을 마치 털어내는 듯한 동작과 함께 왼쪽 다리를 구부렸다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오면서 던지는 투구폼. 엉거주춤, 로보캅여러 가지 이름을 붙였던 그런 폼. 말보다 그냥 한번 보여주면 누구나 웃을 법한 폼을 소유했던 선수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150km의 강속구를 던지던 좌완 투수. 태평양 돌핀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주역.

 

. . .

 

돌핀스 팬들에게는 잊지 못할 인물 중의 한 명이다.

 

돌이켜보면 너무도 아쉬웠던 선수다. 가정에 불과하지만, 만약 현시대에 뛰었다면 그는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 때문에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일지도

 

어쨌든 필자는 그에 대해 모두가 비웃을 수도 있지만 약체팀태평양 돌핀스의 에이스였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현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만, 추억의 에이스 혹은 비운의 투수라고도 할 수 있던 최창호 선수를 추억해보고자 한다.

 

돌풍의 태평양을 이끈 트로이카의 한 축으로 탄생

 

1986년 경북고를 졸업한 최창호. 그러나 그는 프로로부터 선택받지 못했다. 물론 그 시절에는 고졸 선수보다 대졸이 대우받던 시절이다. 어쨌든 오라는 곳도 없었다. 고향 팀 삼성에 입단 테스트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삼성은 저런 선수가 없어도 아쉬운 것이 없다.’라는 입장이었다. 삼성은 프로 출범부터 스타 군단이었기에

 

『그런데 만약 삼성이 그의 잠재력을 알아봤다면 아마도 ‘좌완 최동원’이 삼성에서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삼성으로부터 외면당한 최창호는 청보 핀토스에 연습생으로 입단하게 됐다. 그리고 데뷔(?) 첫해는 1군에 등판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871군 무대에서 8경기에 등판했으나 의미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리고 팀 간판이 바뀐 1988년에도 그는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1989년 그의 야구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고졸 4년 차의 무명 투수였던 최창호는 1989시즌 38경기(선발 29경기)에 등판해 10142세이브 평균 자책점 2.22를 기록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정명원-박정현과 함께 트로이카를 구축하며 만년 약체팀 태평양을 사상 첫 포스트 시즌에 올리는데 중심으로 우뚝 섰다. 최창호는 시즌 평균 자책점 2.223(1위 선동열 1.17), 223.1이닝을 소화하며 무려 191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이 부분 2위를 기록하며 당시로는 보기 드문 좌완 파워 피처의 탄생을 알렸다(참고로 탈삼진 1위는 198개로 선동열이었다).

 

다만 팀이 잘나가던 시절에도 승운이 따르지 않았다. 참고로 1실점 투구를 하고도 패한 경기나 3경기나 됐다. 이런 비운은 포스트 시즌에도 이어졌다. 해태와 플레이오프 2차전에 등판해 그는 역투했다. 하지만 0-1 완봉 패를 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어쨌든 1989년에는 태평양과 팬들 그리고 최창호에게는 잊지 못할 그런 한해였다.

 

이듬해에도 최창호는 돌고래 군단의 마운드를 이끌고 있었다. 1990시즌 최창호는 40경기(27경기 선발)에 등판해 995세이브 평균 자책점 3.20을 기록했다. 2년 연속 10승 달성에는 실패했으나 196.2이닝을 소화(1위 이강철 220.2이닝)하며 이닝이터로의 면모를 과시했다. 게다가 158개의 탈삼진으로 이 부문 리그 3위와 최초로 한 시즌 두 번의 선발 전원 탈삼진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물론 그는 시즌 9승에 불과했지만, 팀이 태평양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런데 안타깝게도 강력한 좌완이 될 수 있던 최창호는 1991년을 그의 커리어 하이로 보내는 동시에 사실상 전성기가 끝났다.

 

『요즘처럼 세부 기록을 따진다면 최고의 시즌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기록도 기록이지만 필자는 최창호가 가장 강력한 모습을 보여줬던 시즌이 1991시즌으로 기억한다.』

 

1991시즌 최창호는 45경기(선발 28경기)에 등판해 15113세이브 평균 자책점 2.93을 기록했다. 그리고 무려 233.1이닝을 소화하며 그해 리그 최다 이닝을 소화한 투수가 됐다. 다승 5, 탈삼진 163개로 리그 3위에 이름을 올렸다(참고로 1위 선동열 210, 2위 이강철 193개였다. 무시무시한 투수들 다음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최창호도 그런 능력이 있던 선수였다는).

 

 

『2년 동안의 혹사와 선발은 물론 마무리까지 했던 최창호. 그는 로보캅과 같은 괴상한(?) 투구폼으로 3년간 무려 653.1이닝을 소화하면서 연평균 200이닝을 소화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혹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최창호를 망가지게 만든 3년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열심히 굴리고 그 뒤를 이은 박영길 감독은 “3년 후를 기약한다.”라고 했지만, 최창호의 야구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다만 다시 말하지만, 그 시절에는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1990년대의 일을 2020년대 기준으로 평가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너무 좋아했던 선수였기에 그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필자가 최창호를 좋아했던 이유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왼손 투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특한 정도가 아니라 괴상한 투구폼에 150km에 육박하는 볼을 던지는 그런 투수. 매력을 못 느끼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1991년의 어느 날 도원 구장에서 최차호는 LG와 경기에서 149km를 기록했던 적도 있었다. 당시 좌완 투수는 빠른 볼을 못 던진다는 선입견을 확실하게 깨준 투수가 최창호였다. 그래서 더…』

 

다만 이는 괴물 모드로 마지막이었다. 1989-1991년까지 3년 동안 최창호는 123경기에 등판했다. 이는 가장 많이 등판한 기록이었다(공동 2위는 121경기로 송진우, 김용수가 있었다). 게다가 653.1이닝을 기록해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그렇게 3년 동안 미친 듯이 던진 최창호의 불꽃은 꺼져버렸다.

 

1992시즌 최창호는 팔꿈치 부상으로 정상적으로 시즌을 소화하지 못하며 19경기 등판. 392세이브와 고작 92.2이닝을 소화했다. 다만 그해 태평양의 수장은 정동진 감독이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최창호를 전력에서 제외했다. 분명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정동진 감독은 1993년에도 부상 선수들을 무리하게 기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정민태-정명원이 KBO리그에 한 획은 긋는 선수가 될 수 있었다.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오다

 

1993년 태평양은 동네북이자 7개 구단의 보약(?)’으로 활약했다. 때로는 LGOB의 발목을 잡으며 나름 고춧가루를 팍팍 뿌려 코끝(?)을 찡하게도 했다. 다만 해태와 대결에서는 눈물만 흘렸다. 1993시즌 해태와 상대 전적은 무려 117패였다. 여기서 그 귀한 1승이 최창호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광주 더블 헤더에서 겨우 따낸 1승이 유일한 승리였다.

 

어쨌든 팀은 단독 꼴찌로 홀로 레이스를 펼쳤다. 그런데 부상에서 회복한 최창호는 24경기 등판(23경기 선발)712패 평균 자책점 2.99를 기록했다. 또한, 162.1이닝 동안 탈삼진 104개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40승도 못한 팀에서 7승을 책임졌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부상에서 일어나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기에 희망적이었다. 다만 돌아온 최창호에게서 90년대 초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구속은 완전히 줄어들었고, 자연적으로 삼진 능력도 사라졌다.

 

1994년 그해 여름은 매우 뜨거웠다. 아마도 역대급 여름으로 남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만년 하위팀 그리고 전년도 꼴찌팀 태평양도 뜨거운 한 시즌을 보냈다. “돌풍 돌핀스! 태풍 태평양!”이라는 팀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말이다. 타선의 윤덕규-김경기-김동기, 마운드에 김홍집-안병원-최상덕-정민태와 함께 최창호가 있었고, 마무리 정명원의 화려한 부활까지 진짜 돌풍을 일으켰다.

 

1994시즌 최창호는 선발의 한 축을 담당하며 27경기에 등판 1211147.1이닝을 소화하며 평균 자책점 4.09를 기록했다. 다만 147.1이닝을 던지고도 탈삼진 84개에 그쳤다. 100이닝 이상 던진 시즌에서 100개 이하의 삼진을 기록한 유일한 시즌이자 선발 최창호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태평양은 인천 연고 팀으로는 사상 첫 한국시리즈 진출과 함께 아쉬웠지만, 준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다시 밑바닥을 경험해야 했다. 태평양의 추락. 그리고 대부분 주전이 부상과 부진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최창호도 같은 길을 걸어야 했다. 고작 8경기에 등판한 최창호는 단 1승도 올리지 못하며 4. 평균 자책점 7.24를 기록하며 1989년 이후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그리고 최창호에게 영광과 아픔을 함께 주었던 태평양 돌핀스는 1995년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변화 그리고 긴 이별…

 

삼미-청보-태평양에 이어 인천 연고에 네 번째 팀으로 현대 유니콘스가 출범했다. 팀의 변화와 함께 최창호도 변하고 있었다.

 

직전 시즌부터 계속된 그의 투구폼 교정은 스프링캠프에서도 계속됐다. 그동안의 느린 투구폼을 버리고 빠른 폼으로 수정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팔 스윙을 작게 하면서 중심축인 왼쪽 무릎을 구부렸다가 일어나면서 팔 스윙을 크지만 빠르게 변화를 줬다. 세트 포지션에서는 머리를 약간 숙이며 주니치 선동열의 엉거주춤 폼을 벤치마킹한 것. 이런 변화는 상체에 의존하던 기존 스타일에서 벗어나 하체를 이용하는 투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흘러가는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1996년 최창호는 재기를 위한 희망보다 위기감이 더 감돌았다. 최창호와 함께 1989년 트로이카의 한 축을 구축했던 박정현과 팀에서 유이(?)하게 연봉도 삭감됐다. 게다가 그의 거취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미 선발은 정민태-위재영을 필두로 김홍집-안병원 등으로 채워졌다. 기회가 온다면 5선발 그게 아니라면 불펜으로도 남아 있을지 미지수였다. 물론 처참하게 떨어졌던 구속이 130km 중반까지 회복된 것은 희망적이었지만 150km에 육박하던 강속구가 사라진 노장 최창호에게 먹구름만 있었을 뿐

 

그러던 최창호에게 기회가 왔다.

 

1996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정민태와 함께 에이스로 기대했던 김홍집이 또 부상을 당한 것이다. 게다가 부상이라면 김홍집 못지않게 이골이(?) 난 안병원도 4월 합류가 불투명했던 것. 결국 팀의 불행은 최창호에게 기회가 됐다.

 

그렇게 찾아온 기회. 최창호는 전천후 투수로 활약하며 1996시즌 36경기(선발 25경기)에 등판 89패 평균 자책점 3.85를 기록하며 140.1이닝을 소화했다. 비록 10승에는 실패했지만 부활이라고 할 수 있던 시즌이었다. 그리고 최창호는 쌍방울과의 플레이오프 3차전. 팀이 2패로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선발로 등판해 6.1이닝을 책임지며 탈삼진 6개와 무실점으로 호투. 팀을 벼랑 끝에서 구원했다. 특히 5차전에서도 구원으로 등판해 플레이오프 MVP가 되며 프로 입단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는 트로피를 획득한 것.

 

어쨌든 최창호는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1997년에도 48경기에 등판해 7101세이브 평균 자책점 5.24를 기록했다. 다만 그에게 선발이라는 자리는 과거형이었다.

 

1998년에는 현대가 최강 전력으로 리그를 압도하며 독주를 하고 있었다. 그런 현대에서 최창호의 역할은 불펜 투수였다. 최창호는 전반기 36경기 11세이브 27.1이닝을 소화하며 평균 자책점 3.95를 기록하고 있었다. 냉정한 말로 당시 현대는 최창호가 없어도 잘 돌아가던 팀이었다. 그 정도로 세월은 많이 흐른 것이었다.

 

그리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1998731

 

최창호는 팀을 떠나야 했다. LG 내야수 박종호를 영입하는 대신 현대는 최창호를 넘겨준 것이다. 충분히 머리는 이해되지만, 가슴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1998시즌 한국시리즈에서 현대와 LG가 만났다. 현대는 42패로 창단 첫 우승이자 인천 연고 역사상 첫 통합 우승팀이 됐다.

 

하지만 우승 확정 직후 마운드에서 부 등 껴안고 울던 정명원과 정민태. 그러나 그 자리에는 최창호가 없었다. 물론 박정현도 없었다. 맏형 정명원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언급했던 그 “()창호와 ()정현이가없었던 것이다. 훗날 박종호는 리그 최고의 2루수가 됐지만 당시 박종호가 없어도 현대는 충분히 우승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최창호가 역할이 축소됐을지라도 함께 했다면그토록 갈망하던 우승을 상대팀 덕아웃에서 지켜봐야 했다.

 

최창호는 이후 LG에서 원포인트 릴리프로 뛰면서 2002시즌까지 현역으로 뛰다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모교인 경북고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으로 넥센-SK 등에서 코치로 활동하다가 2022년부터 제물포고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글을 마무리하며…

 

173cm의 작은 체구. 그러나 상대한테 전혀 밀리지 않았던 불같은 강속구를 가지고 있었다. 마운드에서는 마치 화난 사람처럼 무표정했던 그의 모습. 비로소 경기 종료 벨이 울리며 웃음 짓던 선수(당시에는 경기 끝나면 종료 벨이 울렸던 때도). 비록 화려한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지만, 그는 만년 약체팀의 자존심이었다. 또한 비운의 에이스이기도 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특이폼이라면 절대 빼놓을 수 없었던 괴상한 투구폼. 그 시절 야구 팬이라면 누구나 다 따라 해 봤을

 

어쩌면 시대를 잘못 타고났기에 그의 화려한 재능은 평범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하며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하지만 그래서 그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일 수도

 

● 최창호

● 백넘버 : 31

● 1966년 11월 8일생

● 대구옥산초-대구중-경북고

● 좌완투수

● 1986년 연습생(청보) / 1987년 2차 3라운드(청보)

● 소속팀 : 1986-1987 청보 -> 1988-1995 태평양 -> 1996-1997 현대 -> 1998-2002 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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