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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왕조/왕조의 주역들

국민 유격수 ‘만두’ 박진만

by 특급용병 2024.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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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328

 

수원에서는 현대와 SK의 시범경기가 있었다. 아마도 이날은 2004시즌을 위한 마지막 시범경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교적 날도 따뜻했던 일요일. 수원 야구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팬들이 찾아왔다. 어쨌든 경기는 끝났다. 야구장에 있던 선수단 그리고 팬들도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현대 코치들이 그라운드 안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현대 김재박 감독이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왔다. 또한 포수 장비를 풀세트(?)로 찬 현대 선수가 백네트 앞쪽에 서 있었다.

 

필자는 물론 당시 주변에 있던 이들은 백네트 바로 뒤가 아닌 옆쪽에 있어서 누구인지 선수를 식별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주전 포수 김동수의 나이를 고려해 강귀태를 육성하기 위해 개인 훈련을 시키는 줄 알았다.

 

그리고 정진호 코치가 아닌 김재박 감독이 펑고를 쳤다. 김재박 감독은 보는 이로 하여금 독하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쉴 새 없이 펑고를 쳤다.

 

과거 야구인들에게는 펑고보다 노크라는 표현을 썼다. 일명 살인 노크, 마스크를 쓰고 지옥의 노크(펑고)를 받는다고 해서 살인 마스크라는 표현을 썼고, 말만 나와도 이를 갈던김성근 감독이 직접 치는 것으로 이슈가 됐지만, 사실 80년대 초중반생까지 야구를 한 이들은 감독이 아니면 코치들에게 살인 펑고를 안 받아본 이들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지옥을 체험하는 그런참고로 얼마 전 유튜브에서 박재홍 위원이 김재박 감독에게 2002년이라고 말했지만, 2004년이다.

 

펑고를 처음에는 곧잘(?) 받던 현대 선수는 사실 공을 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또한, 괴성을 지르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20-30분 정도가 지났을까? 김재박 감독은 펑고를 멈췄다. 그리고 펑고를 받던 선수가 마스크를 벗고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외치는 순간 놀랐고, 김재박 감독이 찐마이(진만이)도 수고했어라고 웃으면서 내뱉은 한 마디에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살인 펑고를 받던 주인공은 포수 강귀태도 아니고 신인 혹은 유망주가 아니었다. 당시 프로 9년 차로 이미 팀의 중심이자 고참 반열에 올라선 소위 말해 수비 귀신이었던 박진만이었기 때문이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유입된 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유격수 수비를 두고 박진만에게 시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정도로 수비를 잘하는 박진만이 의도치 않았으나 공개적으로 살인 펑고를 받은 일은 어느덧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

 

화려하지만 너무 쉽게 처리해서 화려하지 않아 보였던 유격수. 김재박-류중일-이종범의 계보를 이은 대형 유격수를 추억해본다.

 

일각수 군단 최초의 유격수 탄생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 그러나 현실은 처참했다. 태평양은 절대 강팀이 아니었다. 1994년 준우승으로 돌풍을 일으켰지만, 삼미를 시작으로 청보에 이은 태평양까지 인천 연고팀은 만년 약체의 대명사였다. 겉으로는 투수왕국이라는 타이틀이 붙였지만,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투수는 몇몇 이름 있는 선수라도 있었지만, 야수진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팀 간판타자 김경기, 19953할 타자로 갑자기 튀어나온 3루수 권준헌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어쨌든 현대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트레이드에 나섰다. 하지만 1990년 중반은 트레이드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었다. 쉽게 대형 트레이드가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구체적으로 최상덕, 안병원, 김홍집 등이 카드가 됐고, 안병원과 송구홍의 트레이드가 진행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트레이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의 입성을 곱게 보지 않던 삼성이나 LG 같은 팀에서 선뜻 나설 일이 없었다. 어쨌든 현대는 많은 약점을 가지고 리그 첫 시즌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약점은 해결이 됐다.

 

고려대학교 진학이 확실시됐던 박진만이 방향을 틀어 현대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대와 프로야구 역사를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아마도 박진만이 대졸로 입단했다면 대형 선수가 되지 못했을지도유급도 했는데 대학 생활이 순탄했을지도 의문이다. 물론 현대도 유격수 문제를 4년 이상 해결하지 못했을 수도).

 

공식 발표는 당시 체육 특기자 수능 커트 라인 40점에 미달해서 대학 진학을 할 수 없었던 것. 요즘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됐지만, 당시에는 프로와 대학 사이의 스카우트 전쟁은 살벌했다. 현대와 고려대 역시 박진만을 두고 살벌한 스카우트 전쟁을 치렀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계약금 28천 만원, 연봉 2천 만원 등 총액 3억에 박진만은 유니콘스 호에 승선하게 됐다.

 

물론 프로 입단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주전이 된 것은 아니었다. 태평양 시절 팀의 주전 유격수는 염경엽이었다. 수비는 나름 훌륭했지만, 방망이는그래도 프로 짬밥을 무시할 수 없는 법. 출발은 염경엽-박진만의 경쟁 체제가 이루어졌다. 김재박 감독 역시 박진만의 기용에 여러 고민을 했다. 분명 훌륭한 기량과 재능이 있는 선수였지만 아마와 프로는 엄연히 다르기에 몇 차례 실수가 자신감 상실과 함께 피우지도 못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다. 그래서 초반 주전 염경엽, 백업 박진만을 구상하기도

 

하지만 1996시즌 개막전 전광판에는 염경엽이 아닌 박진만의 이름이 올라갔고, 이를 시작으로 9년간 박진만은 한 자리를 책임졌다. 1996KBO리그에는 박재홍 신드롬이 일어났다. 그래서 많이 가려졌다.

 

엄밀히 말하면 한화의 송지만, 이영우, 홍원기도 신인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박재홍은 신인 선수들과 경쟁이 아닌 리그를 씹어 먹었으니 그 피해는…』

 

하지만 박진만은 고졸 신인이지만 결코 프로 무대에서 주눅 들지 않았다. 어쩌면 기대 이상으로 좋은 활약을 했다. 데뷔 시즌 115경기 출장 361타수 102안타 홈런 638타점 도루 11개로 타율 0.283를 기록했다. 다시 말하지만 같은 팀에 워낙 괴물 신인이 있었고, 해태 이종범이 유격수로 화려한 공격을 자랑했기 때문에 저평가됐을 뿐, 고졸 신인 그것도 유격수로는 대박을 낸 데뷔 시즌이었다.

 

수비에서는 22개의 실책을 기록했다. 하지만 3-유간 타구를 처리하는 것은 이종범보다 더 낫다는 것이 당시 야구계의 평가였다. 특히 김재박-류중일-이종범을 잇는 대형 유격수로 단숨에 꼽혔다.

 

멘도사를 꿈꾸는(?) 수비 전문선수로 전락

 

성공적인 데뷔 시즌으로 기대치가 높아졌지만, 이듬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선수가 됐다.

 

수비에서는 여전히 큰 문제가 없었다. 물론 김재박 감독은 발이 느리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에게 많은 펑고를 쳤지만어쨌든 수비는 괜찮았다. 문제는 공격이었다. 1997년 박진만의 공격력은 문제가 아니라 거의 재앙 수준이었다. 흔한 말로 박진만이 9이닝을 다 소화하면 아웃카운트 3개는 최소한 상대에게 주고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박진만은 루키 시즌과 다르게 완전하게 바닥을 쳤다. 두 번째 시즌이었던 1997시즌 112경기를 출장했다. 그러나 379타수 65안타 홈런 529타점 도루 7개 타율 0.185로 시즌을 마감했다. 어쩌면 원조 물방망이염경엽의 전철을 밟는 것이라는 불안감을 안겨줬다. 현대에는 염경엽을 필두(?)로 이근엽, 이용주, 안명성 등 공격이 안 되는 내야수들이 많았다. 박진만이 주전으로 뛰었지만, 만약 주전에서 밀려난다면 앞서 언급된 선수들과 큰 차이는 없는 선수로 의심(?)될 정도였다.

 

『다만 데뷔 시즌 홈런 6개를 기록했지만, 무려 1할이나 떨어진 두 번째 시즌에도 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안타 수 역시 절반으로 줄었으나 2루타는 11개나 기록했다. 즉 물방망이로 전락했으나 비교적 한 방은 있던 타자는 확실했다. 참고로 필자는 세이버를 기준 삼는 것은 존중하지만, 올드 스쿨을 선호(?)하기에…』

 

1997시즌이 종료된 후 박진만은 고교 시절 부상으로 박은 왼쪽 무릎의 철심을 제거하며 그동안의 불편함을 덜게 됐다. 그리고 물방망이로 탈출을 선언했다. 하지만 쉽게 변하지는 못했다.

1998년 현대는 리그를 압도하는 시즌으로 인천 연고 역사상 사상 첫 정규리그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박진만은 1998시즌 123경기 출장 360타수 67안타 홈런 433타점 도루 8개를 기록하며 타율 0.203을 기록했다. 직전 시즌에 비해 타율이 약간 상승했지만, 여전히 처참한 타격을 선보였다. 그나마 한국시리즈에서는 13타수 4안타 3타점 타율 0.308을 기록하며 정규시즌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기대치가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대형 유격수의 꿈은 단순히 꿈으로 남는 것 같았다.

 

‘달 코치’와 만남, 그리고 대형 만두로…

 

1998시즌 후 박진만은 김용철 타격 코치와 다시 한번 타격폼을 수정했다. 그리고 앞선 두 시즌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다른 선수가 됐다. 1999시즌 128경기를 뛰며 395타수 104안타 홈런 342타점 도루 5개 타율 0.263으로 환골탈태(?)했다. 박진만은 데뷔 시즌에 이어서 커리어 두 번째 100안타 시즌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새천년 현대에 김용달 타격 코치가 부임하면서 박진만은 이전 4시즌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1998년에 이어 2000시즌에도 현대는 리그를 압도하며 KBO리그 역사상 최초로 90(최종 91)을 돌파했다. 양대 리그라는 괴상한 제도로 인해 플레이오프를 치렀지만, 단일 리그 제도였다면 일찌감치 쉬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커리어 첫 우승 당시에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는 박진만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박종호와 함께 리그 최고의 키스톤 콤비를 자랑하면서 129경기 동안 121안타 15홈런 58타점 타율 0.288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129경기 출장 420타수 121안타 홈런 1558타점 타율 0.288로 막강 현대의 한 축임을 과시했다. 드디어 잠재력이 터진 공격력에 완성된 수비. 비록 KBO리그는 유격수도 공격력을 중요시하지만, 수비에 있어서는 이미 리그 최고가 됐다. 이제 경기 후반 승부처에서 대타로 교체되지 않아도 되는 선수가 됐다. 아니 진정으로 바라던 대형 유격수이자 거포형(?) 유격수로 변신했다.

 

박진만은 새천년 커리어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과 생애 첫 골든 글러브도 수상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최고의 시즌을 보냈음에도 박진만은 변화를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시즌을 위해 스윙 궤적을 크게 가져가는 변화를 줬다. 또한, 오른발에 힘을 주고 있다가 테이크 백 동작 이후 왼발로 힘을 보내면서 힙턴이 이루어지면서 순간적인 폭발력을 만들어내는 스윙으로 거포 아닌 거포(?)로 변신하게 됐다. 2001년 시즌 초반에는 홈런 부분 1위를 달릴 정도로 장타력이 폭발했다.

 

박진만은 2001시즌 122경기에 나와 383타수 115안타 22홈런 63타점 도루 9개 타율 0.300을 기록하며 생애 첫 3할 및 20홈런을 달성했다. 프로 입단 후 최고의 시즌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특히 김용달 코치와 홈런 20개 달성을 놓고 내기한 결과 박진만이 이겼다. 덤으로 2년 연속 골든 글러브 수상을 하면서 박진만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김용달 코치는 완성형 선수를 업그레이드시키는데 일가견이 있던 인물이었다. 물론 때로는 그의 고집과 철학이 악수가 될 때도 있지만, 적어도 현대에서 김용달 코치를 만난 완성형 선수 중에는 박종호-박진만은 물론 박경완, 심정수 심지어 외국인 선수 브룸바까지확실하게 날개를 달았다. 다만 다들 거포형 스윙을 고집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멋진 부활 그리고 긴 인연의 끝…

 

박진만은 2002년 다시 곤두박질쳤다. 다만 과거와 달라진 것은 파워 툴을 확실하게 장착했다. 김용달 코치를 만나 파워 툴을 장착한 것은 최대 장점이었지만 단점이기도 했다. 그의 거포 스윙(?)에 뒷목 잡는 팬들도 많았다는 것. 어쨌든 월드컵 시즌(?)에 박진만은 126경기를 뛰며 401타수 88안타로 타율 0.219를 기록했다. 그러나 홈런 12(57타점)2루타를 무려 24개나 기록하면서 프로에서 20시즌 동안 세 번째로 많은 기록을 할 정도였다. 참고로 박진만이 발이 빠른 선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박진만은 긴 인연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을까? 다시 일어섰다. 2003년 현대는 통산 세 번째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과거와 달리 가세가 많이 기울었고 전력도 떨어진 상황. 하지만 박진만은 129경기를 뛰었고 421타수 119안타 16홈런 48타점 타율 0.283을 기록했다. 또한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통산 세 번째 우승의 주역으로 기쁨을 맛봤다. 다만 골든 글러브는 유격수로 100타점을 달성한 홍세완에게로 돌아가며 생애 세 번째 영광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지만, 그 시절에는 말도 안 되는 기자들의 농간으로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홍세완의 사례도 그렇다. 그 이전에는 포수 최초로 20-20을 달성한 박경완이 있었지만, 우승 프리미엄으로 홍성흔이 받았다. 현대가 가세가 기울지 않았다면 우승 프리미엄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2004년에도 박진만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팀은 통산 네 번째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박진만은 시즌 중에 중심 타자들이 부진할 경우 4번 타자로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심지어 심정수-브룸바보다 더 역할을 잘 해낼 때도 있었다. 그 결과 129경기 434타수 124안타 17홈런 69타점 타율 0.286을 기록했다. 사실 표면적인 기록은 떨어질지 몰라도 2000-2001시즌 그 이상의 활약을 보여줬다.

 

그리고 현대는 삼성과 사상 초유의 9차전 혈투 끝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KBO리그에서 오직 해태만이 달성했던 2년 연속 통합 우승의 주인공이 됐다. 무엇보다도 박진만은 한국시리즈 타율이 0.129에 불과했지만 박진만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한국시리즈 4차전 721, 2루에서 김한수가 친 공이 중전 안타성으로 날아갔다. 빠지면 1점과 함께 배영수의 구위를 보면 삼성의 승리가 확정적이었다. 하지만 박진만은 넘어지면서 타구를 잡아냈다. 그뿐 아니라 커버를 들어오던 채종국에게 정확히 송구하며 실점을 막는 것을 넘어 팀의 패배를 막았다. 그리고 배영수의 퍼팩트 게임을 산산 조각냈다.

 

물론 9차전 8-6에서 강한 빗줄기에 평범한 내야 플라이를 떨어뜨리며 대역죄인이 될 뻔했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어쨌든 4차전 팀의 패배를 막아준 환상적인 그 수비는 지금도 회자 되고 있다. 그리고 4차전의 그 수비는 현대 유니콘스의 유니폼을 입고 안겨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현대는 사실상 모기업 없이 버티고 있었다. 2000년 이후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했고, 구단주가 떠나면서 현대는 더는 과거의 돈대가 아니었다. 그래도 잘 버텼지만, FA 시즌만 되면 늘 불안했다. 2004시즌 종료 후, 현대에는 심정수와 박진만이 FA를 선언했다. 아무도 심정수의 잔류는 생각지도 않았다. 다만 박진만은 달랐다. 팬들은 당연히 그랬지만, 김재박 감독도 박진만만큼은 포기 못 했다. 그러나 박진만의 프로 10번째 시즌은 현대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삼성 유니폼을 선택했다.

 

계약 직후 박진만은 구단 홈페이지에 인사 글을 남겼다. 직전 시즌 박종호와 너무나 다른 분위기였다. 팬들을 그에게 강도 높은 비난을 했다. 사실 그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잘못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비즈니스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팬들은 더 화가 났고,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현대 유니콘스 역사상 1호 유격수였던 박진만을 떠나보내야 했다. 있을 때는 몰랐지만 그가 떠나고 난 후 그의 빈 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밉기도 했고, 그립기도 했다. 현대를 떠난 박진만은 삼성에서 6시즌, SK에서 5시즌을 뛰고 은퇴했다. 이후 그는 지도자 코스를 걷고 있으며, 2022년에는 삼성의 퓨처스 감독이 됐고, 20231군 감독으로 삼성을 이끌고 있다.

 

현대 유니콘스의 유격수 그리고 국민 유격수 만두

 

박진만은 현대에서 9시즌을 뛰었다. 그리고 남은 11시즌을 삼성과 SK에서 뛰었다. 게다가 현대라는 구단이 사라지면서 색깔도 지워졌을 수 있다. 하지만 박진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유니폼은 현대 유니콘스유니폼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현대 색이 강한 선수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박진만에 대해 여러 평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격수로서 하일성 위원의 어려운 타구를 쉽게 처리하는 선수라는 말이 가장 정확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래서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했다. 그는 물 흘러가는 것과 같은 수비를 자랑했던 선수였다. 이종범-류지현 등 동시에 뛰었던 유격수보다 스피드는 많이 떨어졌지만,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타구음과 함께 출발해서 먼저 가 있는 천부적인 감각으로 안정적인 수비를 자랑했다. 동시에 누구보다도 화려했던 수비를 보여줬던 인물이었다.

 

개인적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박진만보다 더 뛰어난 유격수 수비를 자랑하는 선수는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런 선수와 동시대를 살면서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너무도 행복한 일이었다.

 

2006WBC 이후 그에게는 국민 유격수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누구도 이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 유격수보다 만두박진만이 현대 팬들에게 더 깊이 남아 있지 않을지

 

현대 유니콘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다시 현대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대 유니콘스 최초의 유격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는 현대 박진만 선수를 추억으로 간직한다. 대신에 그가 훌륭한 지도자로 오랜 기간 활약하기를 응원한다.

 

박진만

● 백넘버 : 7

● 1976년 11월 30일생

● 인천서화초-상인천중-인천고

● 우투우타/내야수

● 1996년 고졸우선지명 (현대)

● 소속팀 : 1996-2004 현대 -> 2005-2010 삼성 -> 2011-2015 SK

● 주요 경력

- 골든 글러브 5회(2000, 2001, 2004, 2006, 2007)

- 한국시리즈 우승 6회(1998, 2000, 2003, 2004, 200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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