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17시즌 동안 단 한 번도 타이틀을 따낸 적이 없었었다.
그리고 그를 강타자로 기억하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는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지 않았지만, 어려울 때 의리를 지킨 의리의 사나이였다. 팀이 잘 나갈 때도 그는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었고, 팀이 어려울 때도 아픔을 겪을 때도 끝까지 팀을 지킨 사나이.
그가 바로 현대 유니콘스의 영원한 캡틴 이숭용이다.
인천팀 최초의 왼손 거포를 기대하며…
태평양은 1994년 드래프트 2차 1번으로 이숭용을 선택했다. 당시 태평양은 이숭용에게 3할에 20홈런을 기대할 정도로 기대치가 매우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천 연고 역사에서 내세울 만한 좌타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냥 괜찮은 타자가 아니라 거포형 왼손타자의 출현은 돌핀스 군단을 흥분케 했다.
『물론 과거 우리 사회에서 ‘왼손잡이’는 흔하지 않았다. 이런 시대 상황도 있었지만 삼-청-태 역사에서 대형 타자도 극히 드물었지만 왼손타자는 아예 없었다고 해도…어쨌든 이숭용은 입단 당시 계약금 5천만 원을 받았다. 당시 5천만 원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 기대했던 타자였다.』
하지만 이숭용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그는 바로 태평양의 4번 타자 김경기였다. 정동진 감독은 이숭용을 살리기 위해 김경기와 함께 1루와 DH를 나눠서 기용했다. 신인 이숭용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반면 팀 중심이던 김경기에게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신인 이숭용은 선배 김경기에게 찾아가 좋은 경쟁을 해보자고 당돌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만약 경쟁에서 지면 자신이 외야로 떠나겠다고…당시 강력한 위계질서를 자랑하는 스포츠계에서는 어쩌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선배 김경기에 의하면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매우 친해지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김경기의 벽, 그리고 프로의 벽이 너무 높았던 것일까? 그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입단 첫해였던 1994시즌 이숭용은 84경기에 출장해 48안타 3홈런 16타점 타율은 고작 0.229에 그쳤다. 특히 태평양은 1994년 돌풍을 일으키며 인천 야구의 전성기를 보냈다. 하지만 신인 이숭용은 팬들의 머릿속에 완전하게 지워져 있었다.
이듬해 팀이 준우승 후유증으로 주력 선수들이 부상과 베테랑 선수들의 노쇠화로 팀이 7위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이숭용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됐다. 팀의 4번 타자 김경기의 부상과 부진을 반복하자 이숭용에게 기회가 왔던 것. 그리고 김경기가 돌아왔을 때는 팀에서 꿈에(?) 그리던 4번과 5번 타자로 나란히 중심에서 뛰기도 했다.
이숭용은 1995시즌 83경기를 뛰었다. 전년도에 비해 한 경기 더 적은 수치였다. 그러나 68안타 11홈런 45타점 타율 0.255를 기록했다. 물론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데뷔 첫 시즌에 비해 더 많은 가능성을 보여줬다.
현대 왕조의 시작, 이숭용의 야구도 시작됐다
1996년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가 출범하면서 이숭용의 야구 인생도 새롭게 시작됐다.
현대 김재박 감독은 이숭용의 타격 재능을 살려서 공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1루가 아닌 외야로 이동시켰다. 물론 이는 빈약한 팀 타선 강화를 위한 방법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1루는 김경기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숭용은 태평양 시절에 소유했던 어정쩡한 타격폼을 수정했다. 이숭용의 새로운 타격폼은 오픈 스탠스에서 오른쪽 발이 클로스 됐다가 다시 오픈되면서 타격하는 독특한 폼이었다. 이는 일본 오릭스의 이치로를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1995시즌 후 이숭용 역시 일본 오릭스 캠프에 참가하기도…어쨌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프로 데뷔 3년였던 1996시즌 이숭용은 ‘붙박이 5번 타자’로 124경기에 출장 104안타 12홈런 47타점 타율 0.280을 기록하며 현대 클린업트리오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리고 가을 무대에서는 부상 투혼을 하던 김경기를 대신해 4번 타자의 중책을 맡았다. 물론 그가 눈에 띄는 공격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중요할 때 한 방을 쳐주며 4번 타자로 역할을 다했다. 특히 한국시리즈 2차전 역투하던 조계현을 상대로 홈런을 뽑아내며 팀이 연장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과정을 만들어줬다.
이듬해 좀 더 강력한 타자가 되기 위해 이숭용은 ‘외다리타법’으로 타격폼에 변화를 줬다. 그 결과 1997시즌 팀 타자들이 모두 부진에 빠져 있을 때 이숭용은 121경기에 출장 106안타 9홈런 61타점과 타율 0.311로 데뷔 첫 3할을 기록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정교함도 중요하지만, 팀은 그에게 장타를 원했다. 그런데 이숭용은 단 9개의 홈런에 그친 것.
장타력 높이기 위해 다시 한번 변화를 시도했던 이숭용.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실패였다. 1998시즌 107경기를 뛰며 101안타 10홈런 45타점 타율 0.278로 이숭용은 훌륭한 조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본인이 바라던 ‘강력한 5번 타자’와 거리가 멀었다. 다만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중견수로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며 창단 첫, 프로 커리어 첫 우승을 경험했던 시즌이었다. 문제는 너무 기쁜 나머지 마지막 공을 관중석으로 날려버린 것…
이숭용은 1999시즌에도 큰 차이는 없었다. 109경기 81안타 14홈런 39타점 타율 0.264로 어쩌면 풀타임 시즌 가운데 가장 저조했던 시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거의 매년 타격폼에 변화를 주며 도약을 꿈꿨으나 결과는 늘 2% 부족했다. 이것은 이숭용의 단점이기도 했지만 큰 장점이 되기도 했다. 부정적으로 보면 폭발력이 없었고, 긍정적으로 보면 꾸준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소위 뽀록이라도 한 시즌 정도는 터졌으면 했지만, 그것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1997년 이숭용의 모습이 커리어 하이가 될 줄은 몰랐다. 많이 노력하는 선수였고, 하드웨어도 좋은 선수였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새천년 이숭용은 104경기를 뛰며 80안타 15홈런 50타점 타율 0.285를 기록하며 화려하지 않지만, 팀의 두 번째 우승을 이루는데 주역으로 활약했다. 사실 이숭용은 2000년 중견수로도 뛰었었다. 하지만 그는 타선에서 유일한 약점이었다. 이미 외국인 타자로 1루 거포 자리를 채우려 했던 현대. 이에 실패하자 이숭용은 다시 1루로 돌아와야 했다. 단순 기록으로도 이숭용이 있던 자리가 가장 빈약했을 정도…
이듬해 다시 타격폼에 변화를 주며 도전한 이숭용. 그 결과 1997년에 이어 커리어 두 번째 3할(0.300)과 함께 129안타 10홈런 64타점을 기록했다. 2002시즌에는 19개의 홈런으로 커리어 최다 홈런과 타점(76)과 타율 0.284를 기록했지만 역시나 2%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2003시즌은 이숭용의 프로 18시즌 가운데 ‘커리어 하이’ 시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부 스탯을 보면 그렇지는 않지만, 2003시즌 현대는 박재홍이 빠져 있었다. 모기업 역시 너무도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다. 사실 모기업이 없어졌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이숭용은 어려움 속에서도 ‘캡틴’으로써 팀을 견고하게 이끌었다. 그는 133경기 모두 출장하며 0.294의 타율 150안타(커리어 하이) 18홈런 76타점을 기록했고, 현대의 세 번째 통합 우승을 달성하는데 정신적 지주로 역할을 감당해냈다.
『세이버 상으로는 1997년이 커리어 하이 시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체감상 2003년은 그의 최고 시즌이었다. 기록 외에도 팀 사정을 생각한다면 더욱 최고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커리어 하이라는 것도 누군가는 웃을 수 있었다. 답답할 정도로 이숭용은 그 어떤 선을 넘지 못했다.
분명 3할을 친 시즌도 있었지만, 그는 거의 커리어 중 2할 8-9푼의 벽을 쉽게 넘지 못했다. 또한 20홈런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 옛날(?) 힘 있던 젊은 시절, 타신투병 시절에도 이숭용은 타격은 늘 그 자리를 지켰다. 이는 결국 팬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3년은 심정수가 이승엽과 홈런 레이스를 펼쳤다. 그런데 현대는 3번 심정수 4번 이숭용으로 구성됐다. 상대적으로 이승엽은 뒤에 4번 마해영, 5번 양준혁이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는 심정수를 걸리고 4번 타자 이숭용과 대결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러자 현대 팬인지 심정수 팬인지는 모르겠지만 구단 홈페이지에 이숭용에 대한 비판을 넘어 비난이 폭주했다. 그래서 이숭용이(물론 홍보팀이 만들었겠지만…) 팬들에게 사과의 글을 올리는 일도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숭용은 팀을 지켰고, 심정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그와 별개로 이게 사과할 문제였는지…』
의리의 사나이, 현대 왕조의 영원한 캡틴이 되다
2003년 시즌이 끝나고 이숭용은 FA를 선언했다. 당시 현대는 이숭용 외에도 박종호가 FA를 선언했었다. 과거의 현대라면 문제가 없었지만 사실 이름만 현대였을 뿐, 모기업의 방치 즉, 하이닉스는 현대 지분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현대가 2명을 잡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이숭용 역시 서울 팀과 지방 팀에 오퍼를 받은 상황.
이런 흐름 속에 현대는 계약기간 3년, 이숭용은 4년으로 팽팽하게 맞섰다. 계약 조건도 현대와 타구단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서울 팀의 경우 4년 총액 25억까지 배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기에 박종호도 삼성으로 떠났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숭용은 떠나지 않았다. 이숭용은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음에도 3년 17억 5천에 현대에 남게 됐다.
FA 먹튀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이숭용은 달랐다. 그는 부도 수표가 아닌 흥행 수표였다. 계약 첫 시즌이었던 2004시즌에도 전경기 출장하며 137안타 9홈런 85타점 타율 0.293으로 몸값 대비 훌륭한 성적을 남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통산 네 번째 우승이자 해태 이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2연패를 달성한 현대의 중심이었다.
우승의 여운을 즐길 기회도 없이 FA 심정수가 팀을 떠났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박진만도 함께 떠난 것이다. 게다가 외국인 선수 브룸바는 일본으로 떠났다. 우승한 팀이었지만 상처만 남았다. 이때 이숭용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이숭용은 2005시즌 초반 ‘배리 본즈’가 부럽지 않은 활약을 했다. 프로 입단 후 가장 좋은 홈런 페이스는 물론 데뷔 후 첫 20홈런 달성도 확실해 보였다. 아니 30홈런도…왜냐하면 6월까지 무려 14개의 홈런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부상이 모든 꿈(?)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2005시즌 이숭용은 105경기를 뛰며 83안타 14홈런 55타점 타율 0.252를 남겼다. 현대 유니폼을 입고 가장 좋지 않은 시즌이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숭용의 14개 홈런은 6월까지 나온 것이란 사실이다. 7월부터 단 한 개의 홈런도 치지 못했다는 사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아쉬웠던 시즌이었다. 부상 없이 페이스가 계속 이어졌다면 진짜 역대급 시즌을 보낼 수도 있었다. 적어도 서튼과 함께 쌍포를 가동하며 어려웠던 현대는 4강으로 견인했을지도…아무튼…』
다시 오뚝이 아니 귀신같이 이숭용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2006시즌 119경기를 뛰며 106안타 홈런 7개 43타점 타율 0.286을 기록하며 약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팀을 정규시즌 2위로 이끌었다. 다만 플레이오프에서 한화에 막혀 가을 야구를 끝냈던 것은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2007시즌 95경기를 뛰며 규정 타석에는 미달 됐지만 90안타 2홈런 34타점 타율 0.301로 커리어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3할을 기록하게 됐다.
그런데 2007년은 팀 혹은 개인성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현대 유니콘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시즌이었다. 그야말로 눈물의 시즌이었던 것. 현대가 시작되면서 이숭용의 야구 인생도 만개했다. 그런 팀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고, 캡틴으로써 이숭용은 마지막까지 그리고 끝까지 팀을 지켰다.
영웅 승선 그리고 은퇴
사전 발설(?)로 인해 현대 인수는 여러 차례 엎질러졌다. 그리고 팀이 해체로 끝날 위기에 처했을 때, 이숭용은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히어로즈.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팀은 안팎으로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그러나 이숭용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며 후배들을 다독여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우리 히어로즈의 초대 감독 이광환 감독은 SK 김성근 감독과 합의해 이숭용을 정상호와 1:1 맞트레이드를 합의했다. 다만 히어로즈 측에서 현금 1억을 요구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이장석, 박노준 문제였지만, 이광환이라는 인물은 정말 최악이었다. 심지어 특정 코치가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오해하는 것은 참…』
여러 풍파를 겪으면서도 2008시즌 이숭용은 우리 히어로즈에서 109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90안타 3홈런 27타점 타율 0.270을 기록했다. 이숭용의 행보를 보면 크게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결코 정상적인 시즌을 보낸 것도 아니었다. 입단 첫해와 마지막 시즌을 제외하면 가장 좋지 않던 시즌이었다.
하지만 2009년 현대에서 함께 했던 김시진 코치가 2대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이숭용은 마지막 힘을 내게 됐다. 물론 팀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2009시즌 114경기를 뛰면서 107안타 4홈런 52타점 타율 0.296으로 3년 만에 100안타를 돌파했다. 2010시즌에도 90안타 2홈런 30타점 타율 0.274를 기록했다. 크게 나쁘지 않지만 과거에 비해 장타력이 급감한다는 것. 특히 히어로즈는 목동 구장을 쓰고 있었다.
적어도 현대 시절에는 15-18홈런을 치던 타자였는데 힘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2011시즌 이숭용은 2000경기 출장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이숭용은 2000경기 출장을 달성하고 2001번째 경기를 은퇴식으로 갖게 됐다. 그리고 ‘캡틴 이숭용’의 리더십이 멈추게 됐다.
영원한 캡틴 이제는 감독으로…
단 한 번만이라도 ‘몬스터 시즌’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몬스터 시즌은 없었다. 그것은 늘 불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숭용의 장점이자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변함없이(?) 늘 꾸준했다는 사실이다. 잘나갈 때는 ‘올해는 터지겠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최종 성적은 제 자리로…반대로 극심한 부진에 팬들은 분노했지만 결국에는 제 자리로 돌아왔던…하지만 이숭용인 이런 그의 커리어처럼 팀의 처음과 끝을 묵묵히 지키면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했다.
강해 보이지 않지만 강력했던 이숭용. 그래서 그를 ‘캡틴’이라고 부른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현대 유니콘스. 그래서 안타깝지만,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현대 유니콘스는 아니지만, 이숭용은 이제 감독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하고 있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선수로 현역 시절을 보냈던 것처럼 감독으로서도 롱런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감독으로서는 꼭 몬스터 시즌(?)을 경험하기를 기대한다.
● 이숭용
● 백넘버 : 10
● 1971년 3월 10일생
● 서울용암초-중앙중-중앙고-경희대
● 좌투/좌타/1루수-외야수
● 1994년 2차 1라운드(전체 1번) 태평양 지명
● 소속팀 : 1994-1995 태평양 -> 1996-2007 현대 -> 2008-2011 히어로즈
● 주요 경력
- 2000경기 출전(KBO리그 6번째)
- 한국시리즈 우승 4회(1998, 2000, 200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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