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없는 내리막 그리고 결별
1990년대 후반 IMF와 우수 선수들의 해외 유출. 프로야구는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됐다. 그나마 1990년대 중반 혜성처럼 등장한 박재홍은 KBO리그의 중심이었고, 새로운 간판스타였다.
프로 입단 후 5시즌은 이미 리그를 떠났던 이종범이나 현재 진행형 양준혁, 이승엽 등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물론 유형이 다른 선수였지만…그리고 그가 쉽사리 내리막을 달릴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 못했다. 그가 프로야구판을 이끌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2001시즌 박재홍은 127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139안타와 타율 0.284를 기록했다. 단순 수치로도 전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장타력이 급감했다는 것이다. 5시즌 동안 평균 28.6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그였는데 2001시즌에는 18개로 처음으로 홈런 20개 이하를 기록했다. 그리고 도루 역시 7개에 그쳤다. 물론 고질적인 허리 부상 혹은 부상의 위험 때문에 박재홍이 굳이 뛰지 않아도 됐다. 어떻게 보면 외야수로서 2할 8푼대 홈런 20개 정도면 크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2001년도 여전히 ‘타신투병’ 시즌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박재홍의 이런 모습은 요즘 말하는 ‘에이징 커브’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국내에서 목표를 잃었던 것일 수도…아무튼 박재홍이라는 이름값에 전혀 걸맞지 않은 성적표였다.
월드컵 시즌(?)이었던 2002시즌 박재홍은 112경기에 출장 120안타 15홈런 67타점 도루 12개와 타율 0.278을 기록했다. 더는 폭발적인 박재홍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매년 30-30 혹은 20-20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30대 초반을 넘어서면 노장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박재홍은 아직 서른 살이 안 됐었다.
2002시즌이 끝난 후 박재홍은 일본에 진출하겠다고 구단에 요청했다. 물론 당시 박재홍에 대해 트레이드설이 자주 흘러나왔다. 박재홍은 ‘트레이드 머니가 적다면 계약금을 구단에 주더라도 일본에 가겠다’라고 구단에 강력하게 호소했다. 하지만 현대는 일본에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사태(?)는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박재홍이 구단에 이적료+계약금을 주겠다고 말했는지는 의문이다. 당시 언론에서 왜 박재홍 편(?)에서 기사를 썼는지 알 수 없다. 그냥 가세가 기운 현대를 흔들기 위한 것이었을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집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현대 박재홍이 KIA로 가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현금 10억 + 내야수 정성훈을 받아오는 것이 내용이었다. 정성훈이 아무리 유망주였다고 해도 박재홍과 비교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아니 정성훈이 문제가 아니라 박재홍이 떠나는 것에 팬들은 분노했다. 특히 박재홍이 구단에 섭섭함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팬들은 더욱 분노했다.
2000년부터 현대의 연고지는 사실상 없는 것도 맞다. 하지만 박재홍은 현대와 함께 한 현대의 ‘프랜차이즈 선수’였다. 비록 내리막을 걷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보내는 것은 팬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현대 홈페이지는 마비가 될 정도였다. 트레이드 철회하라는 글이 도배가 됐다. 물론 철회될 수 없는 것을 잘 알지만 말이다. 그렇게 박재홍은 7년 동안 현대와의 인연을 정리하게 됐다.
지옥과 같았던 2004시즌, 악연으로 끝난 타이거즈
2003년 박재홍은 돌고 돌아 고향 팀 KIA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어색했다. 특별히 KIA 유니폼을 입은 박재홍의 모습은 너무 어색했다. 어쨌든 비록 현대를 떠났지만 그가 멋지게 부활하기를 기대했다.
KIA에서 첫 번째 시즌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108경기에 출장해 118안타 홈런 19개 66타점 도루 14개 타율 0.301을 기록했다. 폭발적인 박재홍은 없었지만 직전 2시즌과 비교하면 결코 부진한 성적표가 아니었다. 단순하게 클래식 스탯만 놓고 봐도 말이다. 다만 박재홍의 전성기만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를 비난했다.
2004년 박재홍은 시즌 초반부터 여러 가지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김성한 감독은 박재홍의 FA일수를 채워주기 위해 선발 어려워도 대주자, 대수비 등으로 경기에 내보냈다. 어쨌든 박재홍은 김성한 감독이 원해서 데리고 온 선수다. 결코 그를 내칠 이유는 없었다. 박재홍 역시 은퇴 후 김성한 감독에 대해서 비판한 적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김성한 감독이 경질되고 유남호 코치가 대행이 되면서 시작됐다.
유남호 대행은 박재홍은 1군에 올리지 않았다. 당연히 박재홍과 구단은 갈등이 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단장이 박재홍을 폭행했고, 격분한 박재홍이 술잔을 던지면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다. 다만 구단은 언론을 이용해 박재홍을 ‘쓰레기’로 만들었다. 특히 해태 시절부터 장난치면서 박재홍을 광주 팬들에게 ‘배신자’ 프레임을 씌웠던 전력이 있던 프런트였다. 당연히 팬들은 박재홍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 결과 박재홍은 2004시즌 73경기 뛰면서 47안타 홈런 7개 29타점 타율 0.253으로 프로 입단 후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그해 포스트시즌에서 팀이 패하는 상황에서 ‘고참 선수가 빵을 먹었다.’라는 무책임한 기레기의 장난으로 박재홍이 빵을 먹은 주범이 됐고 그는 ‘빵재홍’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며 KIA 팬들에게는 최악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박재홍은 KIA를 떠나게 됐다. 그리고 프로 선수로 출발했던 도시 ‘인천’으로 돌아오게 됐다.
『박재홍의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다. 분명 은퇴 후 유튜브 방송을 통해 밝혀진 이야기들은 박재홍의 시각에서 말한 것들이다. 여기에는 객관적인 사실도 있고, 주관적인 부분도 있다. 확실한 것은 언론은 박재홍을 싫어했다는 것. 그러나 박재홍도 무조건 억울할 일은 아니다. 그가 한창 잘나갈 때 태도나 팬들에 대한 모습들을 고려하면 뭐…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도 많이 변했다는 것.
다만 확실한 사실은 유남호라는 인간은 정말 인성적으로 상식을 벗어난 인물이다. 이는 해태 출신 레전드들의 증언도 그렇다. 심지어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김일권 전 코치의 증언도 그렇고…세대가 다른 선수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인천으로 컴백 그리고 은퇴까지…
2005년 박재홍은 SK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그는 부활했다. 물론 불꽃 같았던 현대에서 첫 5시즌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2005시즌 109경기를 뛰면서 128안타 홈런 18개 73타점 도루 22개 타율 0.304를 기록한 것. 분명 타이거즈와는 맞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후 박재홍은 꾸준하게 홈런 15개 도루 20개 정도를 할 수 있는 그런 타자로 커리어를 보냈다. 2006시즌 18홈런 73타점 22도루 타율 0.259를 기록한 그는 김성근 감독의 부임 시즌이었던 2007년 17홈런 54타점 10도루 타율 0.280을 기록했다. 많이 밀려난 모습이었지만 프로 세 번째 우승을 경험했다. 그리고 1998년 현대에 이이서 SK의 창단 첫 우승 주역이 됐다.
그리고 2008년 박재홍은 전성기에 버금가는 성적을 남겼다(물론 세부 지표를 따졌을 때다). 2008시즌 112경기에 출장한 박재홍은 126안타 홈런 19개 72타점 도루 5개와 타율 0.318을 기록했다. 그런데 2008시즌은 2000년 이후 무려 8년 만에 OPS 0.9를 돌파하며 0.958을 찍었다. 박재홍은 팀이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데 중심 타자로 맹활약했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불꽃이었다.
2009년 113경기 12홈런 15도루 타율 0.270
2010년 82경기 8홈런 1도루 타율 0.220
2011년 74경기 1홈런 1도루 타율 0.186
점점 출전 기회도 줄어들고 성적도 처참하게 변했다. 그리고 2012시즌 46경를 뛰며 홈런 5개를 기록하며 KBO 역대 7번째 300홈런을 달성했다. 이제 박재홍에게는 KBO리그 최초 300-300클럽에 도루 33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전성기 기준으로는 한 시즌이면 될 숫자. 하지만 기회는 줄고 나이가 들면서 사실상 불가능한 기록이기도 했다. 그래도 꼭 달성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시즌 후 구단은 은퇴를 제의했다. 물론 박재홍은 현역 연장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그를 원하는 구단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박재홍은 은퇴를 선언하며 정들었던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300-300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이 기록을 달성했다면 개인은 물론 KBO리그에 매우 의미있는 기록이었다. 어쩌면 300-300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일 수도…현대 야구는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홈런과 도루를 동시에 하는 선수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
은퇴 이후 박재홍은 MBC스포츠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최근에는 유튜브도 운영하는 방송하는 야구인이 됐다.
현대 유니콘스의 박재홍
박재홍은 현대에서 단 7시즌밖에 뛰지 않았다. 그의 프로 17시즌을 생각하면 극히 일부분이다. 그리고 어쩌면 현대라는 팀이 지워질 정도로 더 오랜 세월을 SK에서 보냈다. 하지만 그의 프로 커리어에서 현대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부터 인천을 연고로 하는 팀들은 강력한 타자를 보유한 적이 없었다. 80-90년대 김성한, 이만수와 같은 타자도 없었고, 90년대 장종훈, 이종범, 양준혁 등과 같은 타자도 없었다. 그런 팀에 박재홍이라는 괴물이 보여준 강렬한 5시즌은 인천 팬들에게 그리고 현대 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그런 선수였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던 그의 20대 시절…그러나 좋은 기억과 좋은 추억을 남겨준 박재홍.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있던 것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 박재홍
● 백넘버 : 62
● 1973년 10월 2일생
● 서림초-무등중-광주제일고-연세대
● 우투/우타/외야수
● 소속팀 : 1996-2002 현대 -> 2003-2004 KIA -> 2005-2012 SK
● 주요 경력
- 신인왕(1996)
- 골든글러브 4회(1996, 1997, 1998, 2000)
- 홈런왕 1회(1996)
- 타점왕 2회(1996, 2000)
- 30-30클럽 3회(1996, 1998, 2000)
- 한국시리즈 우승 5회(1998, 2000, 2007, 2008, 2010)
사진 : 현대 유니콘스 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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