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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왕조/왕조의 주역들

유니콘스 '불꽃 남자' 정명원 (2)

by 특급용병 2024.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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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시즌 한국시리즈 4차전…

 

1995년을 끝으로 태평양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1996년 현대 야구단이 출범했다. 정명원은 변함없이 유니콘스의 마무리로 활약했다.

 

정명원은 신생 구단 돌풍과 함께 부활했다. 1996시즌 53경기에 등판 8526세이브 97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점 1.58을 기록했다. 또한 구원 부문 2위에 오르며 KBO리그 통산 5번째 100세이브 투수가 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94시즌에 보여줬던 강렬한 모습은 사라졌다. 쌍방울과 플레이오프에서 정명원은 0-0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랐다. 하지만 베테랑 박철우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면서 그의 현역 생활을 연장(?) 시켜주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는 마무리 자리를 불펜 투수조웅천에게 내줘야 했다.

 

벤치의 신뢰는 떨어졌고 더 정확히 말하면 정명원의 구위는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현대는 선발 정민태, 불펜 조웅천을 제외하면 확실한 투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리즈 전적 12패로 벼랑 끝에 몰렸다. 그리고 4차전 김재박 감독은 정명원을 선발로 내세웠다. 정명원도 정명원이지만 현대는 대단한 모험을 한 것이었다.

 

1회초 시작과 동시에 7개 연속 볼을 던지며 스스로 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상기된 그의 얼굴. 하지만 정명원은 정명원이었다.

 

“18”

 

자신을 강하게 질책하던 그는 12, 3루에서 해태 4번 타자 이호성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분위기를 완전히 바꿨다. 그리고 2회부터는 해태 에이스 이대진과 숨막히는 투수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6회쯤 지났을까? 놀랍게도 그는 단 1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7회를 넘어 8회에 돌입하자 참고 있던 중계진도 노히트노런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대진에게 묶여 있던 타선이 8회말 대거 4점을 뽑아내면서 대기록은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9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온 정명원. 마지막 타자 대타 김재덕은 폭포수 같은 포크볼로 잡아내면서 그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강타선 해태를 상대로 단 한 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KBO리그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것이다.

 

무뚝뚝한 상남자답게 그는 대기록 달성에도 큰 반응이 없었다. 물론 우승은 해태의 몫이었지만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 정명원은 팀과 팬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잊지 못할 대기록이자 큰 추억을 안겨줬다. 어쩌면 KBO리그에도 영원한 추억을 만들어준 셈이었다.

 

1997시즌 정명원은 다시 마무리를 맡았다. 하지만 주전들의 줄 부상과 부진으로 팀이 바닥을 쳤고, 정명원 역시 구위가 완전하게 떨어졌다. 정명원 역시 55경기에 등판해 21028세이브 115.2이닝 평균자책점 3.50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문제는 많은 패수가 아니었다. 구위가 완전히 떨어진 것이 진짜 문제였다. 떨어진 구속과 포크볼의 위력으로 사실 힘겹게 버틴 한 시즌이었다. 또한 잠깐이지만 1997시즌에는 선발(6경기)로 등판하며 답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쓸 정도였다.

 

결국 1998년 현대는 최초로 도입된 외국인 선수 제도를 통해 마무리 투수를 뽑았다. 이에 따라 정명원에게는 큰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시련, 새로운 도전 그리고 마지막 불꽃

 

32살의 노장 투수. 오랜 기간 마무리만 하던 그에게 선발로 이동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구위가 많이 떨어졌다는 것과 오랜 기간 마무리로 뛴 것. 또한 구종이 단조로운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예상은 완전하게 뒤집어엎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정명원은 1989년 이후 아니 어쩌면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붙박이 선발 투수로 변신한 것이다. 그 결과는 최고였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1998시즌 정명원은 28경기에 등판 148184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점 1.86을 기록했다. 1점대 평균자책점은 20세기 마지막 1점대 평균자책점으로 타이틀 홀더가 된 것이었다. 참고로 정명원 이후 선발 투수가 1점대 평균자책점으로 타이틀 홀더가 된 투수는 지난 2010년 류현진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기준 그는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완투 5, 완봉 3회로 누구보다 화려한 시즌을 보냈다.

 

현대는 1998시즌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이루며 창단 첫 우승의 영광을 차지했고 그 중심에 정명원도 함께 했다.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정명원은 함께 고생했던 ()창호와 ()정현이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소감을 밝히며 열혈남아의 뜨거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명원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1999시즌 정명원은 선발, 조규제가 마무리로 출발했다. 그러나 조규제가 부진하자 김수경이 마무리 중책을 맡았다. 하지만 김수경도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팀 요청에 큰형님정명원이 다시 마무리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1999시즌은 정민태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투수들이 부진했다. 정명원도 마찬가지였다. 30경기(선발 11경기)등판 547세이브 84.1이닝만을 소화하며 평균자책점 4.06을 기록했다. 평균자책점은 초절정의 타고투저. 아니 타신투병(?) 시즌이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았다고 하지만 전년도를 생각하며 너무도 초라한 모습으로 한 해를 마감했다.

 

2000시즌 정민태-김수경-임선동이 굳건한 선발 트로이카를 구축한 가운데 사실 정명원 많은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이제 더 이상 강력한 모습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또한 개인사로 인해 선발보다 불펜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팀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이 됐으나 정명원은 완전히 잊혀진 투수가 됐다.

 

정명원 2000시즌 16경기 등판 5261이닝 3.98의 평균자책점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경기는 한국시리즈 4차전. 그것도 패전 처리로 등판했다.

 

시즌 후 정명원은 연봉과 관계없이 1년 더 뛰겠다고 구단에 현역 의지를 나타냈다. 하지만 구단은 그에게 현역이 아닌 지도자로 남아줄 것을 원했던 것. 불같은 그의 성격(?)과 달리 큰 잡음 없이 구단 요청을 수용해 은퇴하게 됐다.

 

2001년 개막전 은퇴식과 함께 그는 요미우리 코치로 연수를 떠났다가 현대로 돌아왔다. 이후 현대의 마지막까지 지도자로 남아 있다가 이후 넥센-두산-KT-KIA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이후 현재는 영동대 인스트럭터로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원한 큰형님 정명원

 

그는 쌀쌀한 날씨에도 반팔(?) 차림에 마운드에 등장하는 열혈남아였다.

 

포수가 공을 빨리 던져주지 않으면 빨리 던지라고 강하게 재촉할 정도로 성격이 급했다(대표적으로 정명원의 급한 성질을 자극했던 인물 중 김성태라는 포수가 있었다).

 

그러나 투박하지만 섬세하고 후배들을 위해 강력한 복수극을 펼쳤던 우리의 큰형님.

 

1994년 특급 소방수로 돌아왔을 때는 약체의 설움을 받던 팬들에게 우리도 선동열 같은 마무리 투수 있다.’라는 자부심을 심어줬다. 그리고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 벼랑 끝에 몰려 있을 때, 혼신의 역투로 대기록과 승리를 안겨주기도 했다.

 

현대 코치로 있을 때, 백넘버 23번을 달고 있던 신철인이 28번을 달고 싶다고 할 때세이브왕 되면 넘겨주겠다.”라고 독려했던 큰형님. 그가 바로 정명원이었다.

 

세월이 지났어도현대는 사라졌어도 그는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는 영원한 유니콘스의 최후의 보루이자 영원한 큰형님으로 남아 있다.

 

● 정명원

● 1966년 6월 14일생

● 군산남초-군산남중-군산상고-원광대

● 우완투수

● 1989년 신인 드래프트 2차 2라운드 (태평양)

● 소속팀 : 1989-1995 태평양 -> 1996-2000 현대

● 주요 경력

 - 구원왕 1회(1994)

- 평균자책점 1위(1998)

- 골든글러브 1회(1994)

- 한국시리즈 우승 2회(199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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