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유니콘스, 도원, 그리고 우승
1995년을 끝으로 태평양 돌핀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그리고 현대 유니콘스의 역사가 1996년 시작됐다. 그리고 김경기는 새롭게 시작하는 팀의 주장이 됐다.
현대는 박재홍이라는 슈퍼 루키를 앞세워 선풍적인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박재홍에게 가려지기는 했지만, 김경기의 방망이도 불이 붙었다. 시즌 출발은 좋지 않았지만 5월과 6월 맹타를 휘두르며 그는 프로 데뷔 첫 3할에 도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7월 경기 도중 손목 부상을 당하면서 힘겨운 하분기를 보내게 됐다. 사실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었다. 그런데 팀이 선두를 달리다가 계속 추락하는 상황에서 그는 주장으로 고통을 참는 방법을 선택했다.
부상으로 7월 이후 3할의 벽은 무너졌다. 또한 한때는 홈런 선두 박재홍을 사정거리 안에서 추격하던 홈런포도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는 팀의 4번 타자이자 정신적 지주로 투혼을 발휘하며 시즌을 보냈다. 그 결과 1996시즌 115경기 출장 타율 0.274 홈런 20개 64타점을 기록하며 생애 두 번째 20홈런을 기록했다.
부상으로 힘겨운 후반기를 보냈지만, 전년도 부진을 완전하게 만회했다. 그리고 신생구단 현대의 가을 야구를 이끄는 주역으로 활약을 했다.
그런데 김경기의 투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손가락이 마비될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준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파울 플라이를 잡다가 펜스에 충돌하며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다. 김경기의 투혼은 한국시리즈에서도 계속됐다. 왼손을 전혀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1차전과 6차전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번트에 대비한 압박 수비는 일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혼에도 불구하고 해태의 벽을 넘지 못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의미가 있는 시즌이었다. 이는 이승엽을 제치고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승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쉽지 않은 경쟁에서 받은 것에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마지막 골든글러브였기 때문이다.
1996년 시즌이 종료된 후 김경기는 그동안 괴롭혀 오던 왼쪽 손등을 수술했다. 그의 복귀 시점은 빠르면 5월 정도…그러나 빠른 회복으로 시범경기를 소화했고, 연일 장타를 가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시즌 개막전에서 홈런포를 가동하며 김경기는 이전보다 업그레이드된 타자가 됐다. 4월 한 달 동안 김경기의 타격감은 절정에 이르렀다. 다만 홈런이 나오지 않은 것은 매우 불길(?)했었다. 결국 그 예감은 적중했다. 점점 하향세를 타더니 길고 긴 슬럼프에 빠지게 됐다. 무엇보다 장타가 터지지 않았다. 갑자기 똑딱이 아닌 똑딱이 타자가 된 것이다. 급기야 2군으로 강등됐다.
다시 1군으로 돌아온 김경기. 그런데 그는 본래 포지션인 1루가 아닌 3루수로 돌아왔다. 프로 8년차 베테랑에게 모험이고 자존심이 무너질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팀을 위해서 과감한 선택을 했다. 사실 아마시절 김경기의 포지션은 3루수였다. 고려대 시절 3루수로 뛰었고, IBA 국제대회에 참가해서 BEST 9에 뽑히기도 했었다. 태평양 입단 후에도 줄곧 3루 훈련을 했다. 그러나 개막전 1루수 겸 6번 타자로 나오면서 7년간 1루의 주인이 된 것이다.
1997시즌 김경기 91경기 출장 79안타 6홈런 51타점 타율 0.254로 사실상 데뷔 이래 최악의 시즌을 마감했다.
하지만 1998시즌 김경기는 최고의 조연으로 부활했다.
1998년 현대는 3루수 출신의 백인 선수 ‘스코트 쿨바’를 영입했다. 하지만 김경기보다 떨어지는 수비력으로 김경기는 1루와 3루를 병행하면서 시즌을 소화했다. 게다가 4번 타자로 쿨바에게 빼앗기며 6번 타자로 밀려났다. 그러나 김경기는 흔들림 없는 팀의 맏형으로 버팀목이 됐다.
1998시즌 김경기는 생애 두 번째 전경기(126경기)를 출장하며 118안타 홈런 18개 56타점 타율 0.274를 기록하며 현대의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의 주역이 됐다. 참고로 인천 연고 팀으로는 최초의 정규리그 우승이었다.
그리고 94년 이후 4년 만에 한국시리즈에서 LG를 다시 만나게 된다.
1차전 선발 투수 정민태가 초반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1-2루 간을 빠져나가는 라이너성 타구가 나왔다. 하지만 김경기는 다이빙 캐치로 잡아내며 흔들리던 정민태의 어깨를 가볍게 만들었다. 또한 시리즈 내내 눈 다래끼로 타격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의 방망이는 식지 않았다. 한국시리즈 6경기에서 7안타 3타점 타율 0.304를 기록했다. 팀은 4승 2패로 LG를 꺾고 팀 창단 첫 우승, 그리고 인천 연고 팀으로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됐고 인천 연고 팀 첫 통합 우승을 달성하게 됐다.
누구보다 화려했던 조연 김경기는 우승 트로피를 도원 구장에서 들어 올리며 우승 깃발을 들고 퍼레이드를 할 때 인천 팬들의 恨은 그렇게 감격의 눈물과 함께 씻겨 나갔다.
현대와 결별…인천으로 컴백
김경기는 1999시즌 개막전 KBO 모든 선수를 대표해서 도원 구장에서 선수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인천에서 현대의 마지막 시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김경기와 유니콘스의 인연도 점점 끝을 향하고 있었다. 1999시즌 김경기는 92경기에 출장 73안타 홈런 6개 37타점 타율 0.277에 그쳤다.
그리고 새천년인 2000년 현대는 외국인 선수 2명을 모두 내야수로 선택했다. 1루 자원 에디 윌리엄스, 3루 자원 탐 퀸란. 김경기에게는 현역 최대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현대가 연고지 이전을 선언하면서 인천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심지어 김경기를 고향 팀으로 보내달라고 시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현대는 현금 트레이드 형식을 통해 김경기를 SK로 보냈다.
『일부 팬들은 인천 팬들의 힘으로 김경기가 고향에 돌아왔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니다. SK는 현대에 대한 인천 팬들의 적개심을 키워가는 마케팅을 했다. 특히 아무리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는 것이…
김경기가 현대를 떠나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가장 큰 문제의 출발은 선수협 문제로 후배 전준호와 마찰이었다. 처음부터 두 선수가 대립했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지난 일이긴 하지만 굳이 좋지 않은 일을 밝히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스프링캠프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준호는 시즌 초반 결장하게 됐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김경기는 어느 정도 미운털이 박혔다고 볼 수밖에…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오해 때문이었다. 이는 정민태가 배신자라고 욕먹는 것과 비슷한 사례다. 지금도 아닌 당시 국내 선수들이 구단과 반하는 발언을 할 수 있었을까? 분명 밝혀졌지만, 정민태-박진만이 연고지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어필했다는 것은 사실 무근이었다. 언론+SK+그들을 추종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소설이었다. 마찬가지로 김경기로 그랬다.
애초에 김경기가 고향 팀에 보내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그 당시에 그들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것일 뿐이다. 당시 모 커뮤니티를 생각하면 한숨 나온다. 이것은 필자의 사견도 아니다. SK 코치 시절 본인이 밝힌 것이다. 결국 김경기는 팀을 떠나야 했고, 마침 연고지 이전 문제가 극에 달하면서 고향 팀으로 컴백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게 된 것이다.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은 김경기는 인천 팬들만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태평양-현대 팬이라면 연고지와 관계없이 좋아했던 선수였다. 그런 존재였던 김경기가 현대를 떠나게 된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특히 SK가 마치 김경기에게 성대한 은퇴식과 매우 대우를 잘해줄 것처럼 언론 플레이를 했는데…』
SK로 트레이드된 김경기. 그러나 그곳에 버티고 있던 인물은 강병철 감독이었다. 그는 롯데 시절에도 베테랑들을 싫어했던 인물이었다. 그 결과 김경기는 뛸 기회가 없었다. 그렇게 “인천의 아들”이라고 마케팅했던 SK. 대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김경기는 1-2군을 오가면서…정확히 말하면 팬들이 난리 치니까 마케팅 차원에서 가끔 벤치에 앉혀 두는 정도라고 해야 할까…
당시 SK는 현금을 다 팔고 남은 쌍방울 선수단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김경기가 충분히 뛸 수 있었다. 김경기가 라인업에 못 들어 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강병철 감독은 물론 SK 구단 역시 ‘인천’을 외치면서 현대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정작 인천의 아들, 인천 레전드 김경기를 철저하게 이용한 것에 불과…
어쨌든 김경기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마지막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2001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 SK에서 코치와 2군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2017년부터 SPOTV 해설을 하기도 했었다. 현재는 우신고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 마음속에 영원한 4번 타자 김경기
냉정하게 선수 김경기가 남긴 기록은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태평양이 존재하던 시절 강팀으로 군림하던 팀들의 4번 타자는 삼성의 이만수, 해태 김성한, 빙그레 장종훈…그들과 결코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로 파괴적인 홈런 타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만년 하위 팀 태평양 팬들에게는 분명 최고의 타자였다. 적어도 필자는 그랬다.
물방망이 타자들로 도배했던 태평양 시절 유일한 희망이 김경기였다. 현대 시절에는 박재홍과 같은 괴물 타자도 있었다. 그러나 김경기라는 타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행복했었다. 비록 그는 현대와 결별했고, 현재는 현대라는 팀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유니콘스의 영원한 주장이자 보스였다.
요즘 프로야구 지도자들의 흐름을 보면 아마 다시 프로팀 그것도 감독으로 올 수 있는 일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로 감독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마 야구에서도 훌륭한 선수들을 육성할 수 있는 진짜 지도자가 되기를 항상 응원한다.
에피소드 1 - 96년 8월 7일 도원
전날 정민태가 시즌 10승을 달성하고 이날은 위재영이 10승에 도전했다. 삼성 선발은 전병호. 0-0으로 진행되던 가운데 2회말 선두타자 김경기가 전병호의 슬라이더를 받아쳐 좌측 담장을 넘겼다. 팬들은 홈런에 함성을 지르고 있었는데…환호성은 폭소로 바뀌었다.
홈런을 된 것을 확인하고 김경기를 쳐다보는 순간 1루를 밟고 2루로 향하던 김경기가 그대로 엎드려 버린 것. 일단 우스운 모습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다음 날 신문으로 확인 결과 1루 베이스를 밟는 순간 스파이크 징이 진공 베이스에 박히면서 다리가 꼬였고, 김경기는 넘어진 것이었다.
에피소드 2 - 허무하게 아웃된 OB 안경현
OB와 잠실 낮 경기였다. 투수는 김홍집, 1루 주자는 안경현. 김홍집은 여러 번 1루에 견제를 했다. 그리고 다시 견제, 그런데 이때 안경현이 고개를 푹 숙이고 덕아웃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상황은 이랬다. 김홍집이 1루에 견제했다. 안경현이 귀루한 후, 등을 돌려 1루 덕아웃을 보고 있었다. 이때, 김경기가 투수에게 공을 던지는 척하고 있다가 안경현이 베이스에 떨어져 리드를 하는 순간 김경기가 안경현을 태그. 상황이 종료된 것이다. 안경현은 지금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을지...
● 김경기
● 1968년 4월 5일생
● 한양초-상인천중-인천고-고려대
● 우투우타/내야수
● 1990년 신인 드래프트 1차 지명(태평양)
● 1990-1995 태평양 -> 1996-2000 현대 -> 2000-2001 SK
● 주요 경력
-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1회(1998)
- 한국시리즈 우승 1회(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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