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시즌 후반기가 펼쳐지던 어느 날이었다.
당시 잠실에서는 OB 베어스와 현대 유니콘스의 평일 야간 경기가 치러졌다. 그리고 라디오 중계를 하던 유수호 아나운서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라인업을 소개하고 있었다.
“6번 타자! 써어~드! 베이스맨! 김경기! 7번…”
유수호 캐스터의 특유의 목소리와 발음이 이어지는 순간 귀를 의심하게 됐다. 이는 유수호 캐스터의 실수였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김경기의 포지션은 1루였기 때문이다. 경기 내내 그의 포지션을 의심했는데…밤늦게 진행된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통해 그가 1루가 아닌 3루로 경기에 나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해 김경기는 타격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간 후, 포지션을 변경한 것이다.
프로 8년 차…팀의 주장…
그런 그가 시즌 중에 포지션을 변경하는 것은 모험이자 자존심의 문제였다. 만약 그가 자신의 본래 포지션을 고집한다고 해도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팀을 위한 희생을 선택했다.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 3루에서 김경기는 고군분투했다.
강한 타구가 날아오면 잡기보다는 두꺼비가 파리를 낚아채듯이 일명 ‘몸빵(?)’으로 타구를 막아놓고 다음 플레이를 이어갔다. 심지어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의 포토제닉(?)으로 김경기의 몰빵 호수비(?)를 아웃으로 연결하지 못한 1루수 이숭용이 글러브를 패대기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듬해 외국인 선수들이 한국 땅을 밟기 시작했다. 현대는 3루수 출신 백인 타자를 뽑았다. 하지만 도저히 3루수로 기용할 수 없다는 코칭스태프의 판단에 다시 김경기는 1루수 미트가 아닌 내야수 글러브를 껴야 했다. 1997년은 프로 입단 후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이제는 명예 회복을 위해 뛰어야 하는 시점인데 포지션 변경은 악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경기는 팀이 원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랬다.
김경기는 인천 팀의 4번 타자였다.
그러나 김성한, 이만수와 같은 그런 타자도 아니었다. 강팀 기준이라면 평범한 선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팀내 유일하게 ‘한방’을 칠 수 있는 타자였다. 그래서 태평양과 현대 팬들, 더 나아가 그 시절 인천 팬들은 그를 ‘인천의 아들’, ‘인천의 레전드’라고 부른다.
Mr. 인천, 돌핀스 4번 타자의 등장
1990년 1차 지명으로 태평양에 입단한 국가대표 출신의 김경기. 그는 선수 김경기보다 인천야구의 대부 ‘김진영 감독의 아들’로 더 알려졌던 인물이다. 어쨌든 계약금 6천만 원, 신인 연봉 상한선 1천 2백만 원에서 5백만 원이나 더 받고 입단한 ‘인천의 거물 타자’였다. 그 정도로 기대를 모았던 타자였다. 그리고 홀로 고군부툰하던 김동기와 물방망이의 태평양을 살려줄 그런 타자로 팬들은 기대를 모았다.
프로 데뷔 첫 시즌 김경기는 120경기에 출장 118안타 홈런 10개 68타점을 올리며 타율 0.285를 기록했다. 타격 17위, 최다안타 7위, 홈런 16위, 타점 5위 어쩌면 평범한 기록일 수도 있지만, 그는 입단과 동시에 태평양의 간판타자로 급부상했다.
이듬해 김경기는 109경기에 출장해 타율 0.291을 기록했다. 그러나 타율은 소폭 상승했지만 114안타 8홈런 59타점으로 대부분의 기록은 소폭 하락했다. 물론 팀이 태평양이고 그 시절 김동기 정도를 제외하면 상대가 무서워할 타자도 없었다. 그렇다면 결코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안타, 홈런, 타점 부분 팀내 모두 1위였던 것…게다가 규정 타석을 채운 선수들 가운데 타격은 1위였다. 이것이 바로 태평양의 현실이었다.
김성한-이만수 그리고 장종훈 등과 같은 화려한 커리어를 남기지 못했지만, 꼴찌팀, 만년 하위 팀 팬들에게는 그들에 버금가는 그런 존재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훌륭한 타자처럼 여겨졌던 존재였다.
이런 팬들의 응원에 힘을 받은 것이었을까? 1992시즌 김경기는 전경기(126경기)를 뛰며 타율은 0.254로 입단 후 최저 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118안타와 함께 무려(?) 홈런 21개 65타점을 기록…인천야구 역사상 최초의 20홈런 타자가 됐다. 팀은 4강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김경기의 존재만으로 태평양 팬들은 충분히 위안을 삼게 됐고, 다음을 기대할 수 있었다.
수퍼 루키 김홍집의 입단 등 도약을 꿈꾸던 1993년. 그러나 김경기는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1993시즌 단 86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최종 성적표는 타율 0.280 홈런 8개 49타점을 기록하며 태평양 돌핀스의 압도적인 꼴찌를 막지 못했다. 더 가슴 아픈 사실은 김경기가 입단 후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그런데 홈런과 타점은 팀 내 1위였다는 사실. 타율도 LG에서 이적해 온 윤덕규에 이은 2위였다는 것도 마음 아픈 현실이었다.
태평양의 돌풍을 이끈 인천의 자존심
1993시즌 압도적인 꼴찌를 했던 태평양. 1994시즌이라고 크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전혀…그럴만한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말했다. “야구 모른다.”라고 말이다. 1994년은 LG가 신인 3인방을 앞세워 신바람 야구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돌풍이 있었다. 바로 만년 약체팀 태평양의 돌풍이었다. 선발 5명 가운데 4명이 10승 이상을 거뒀고, 마무리 정명원은 44세이브 포인트로 구원 부문 신기록을 세웠다. 이것이 태평양 마운드의 힘이었다.
마운드에 비해 공격력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이전과 달리 마운드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술(?)을 사용했고, 그것은 적중했다. 왜냐하면 태평양 중심에는 김경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매 시즌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던 김경기. 그러나 1994시즌에는 124경기를 뛰면서 타율 0.277과 홈런 23개 70타점으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 것이다. 특히 시즌 막판까지 김기태와 홈런왕 경쟁을 펼쳤다.
다만 쌍방울과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김경기는 1개 차이로 홈런 부문 2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태평양 최창호는 김기태와 정면승부를 펼쳤다. 하지만 쌍방울 박성기는 김경기를 4연타석 고의4구로 출루시키며 홈런을 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해버렸다. 참고로 김기태는 이날 4안타를 쳤고, 그 중 홈런 1개가 있었는데 이것도 그라운드 홈런이었고, 이날 경기로 사실상 쐐기를 박았다(이를 계기로 한동화 당시 쌍방울 감독과 박성기는 물론 쌍방울이라는 팀은 정말 싫어지기도…)
비록 홈런왕에 실패했지만, 김경기는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가을 무대를 밟게 됐다. 그리고 그동안 쌓였던 인천 팬들의 恨(?)을 풀어주었다.
김경기는 한화와 플레이오프에서 1-3차전까지 3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1차전에서는 2회 정민철에게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을 기록했다. 2차전에서도 한방이 터져나왔고, 3차전에서도 홈런은 계속됐다. 1-1로 팽팽히 맞선 연장전 10회초 2아웃 주자 없는 상황, 마운드는 정민철. 파열음과 함께 김경기의 타구는 대전 야구장 백스크린을 때리는 역전 홈런이 됐다. 이 홈런은 태평양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태평양은 인천팀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하지만 결과는 4전 전패였다. LG의 전력은 막강했다. 그리고 태평양은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 그 결과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김경기는 4번 타자로 몫을 다했다. 1차전 이상훈한테 완전하게 눌려 있을 때, 침묵을 깬 것이 김경기였고, 시리즈 타율 0.333를 기록했다. 다만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듬해 태평양은 다시 과거의 약팀으로 돌아갔다. 주전 선수들의 노쇠화 그리고 줄부상. 김경기 역시 그 중심에 있었다. 1995시즌 부상과 부진 속에서 96경기에 출장 타율 0.295 홈런 12개 46타점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돌핀스 군단의 역사가 멈추는 시즌이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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