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6월 2일…
재계 라이벌 현대와 삼성이 도원에서 주말 3연전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승부는 이미 현대 쪽으로 너무 많이 기울었다.
그런데 경기 후반 세이브 상황도 아닌데 정명원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이것이 엄청난 사건(?)을 만들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상기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라온 정명원은 첫 타자 양준혁을 맞춰버렸다. 이때 양준혁도 뭔가를 직감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 등장한 이승엽에게 몸에 바짝 붙는 볼을 던졌다. 가까스로 피한 이승엽. 하지만 정명원은 작심한 것처럼 이승엽의 등판을 맞췄고, 이승엽은 “악”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동시에 양 팀 덕아웃에 있는 선수들은 물론 코치까지도 그라운드에 난입하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다.
하지만 정명원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와 봐! ㅆㅂ!”
그랬다. 정명원은 애초에 경기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후배를 위한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마운드에 오른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과정이 있었다. 현대-삼성은 라이벌 관계라는 것을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전에 맞대결에서 삼성 투수들이 현대의 신인급 선수들에게 빈볼을 자주 던졌다(아마도 수원 경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근엽-권준헌이 희생양이었고, 신인 박진만도 표적이 됐다. 이에 젊은 선수들은 “야구를 못 하겠다.”라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결국 쌓이던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팬들의 비난, 징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단지 후배들을 지키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정. 명. 원.
189cm의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 화끈한 성격처럼 불같은 강속구와 긴 손가락을 이용해 한국 최고의 포크 볼을 던졌다. 또한 든든하게 팀을 지켜줬던 수호신이었다. 때로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던 순박했던 사나이…
그를 “큰형님”이라고 쓰고 “불꽃 남자”로 읽는다.
야생마의 비상과 혹사
군산상고-원광대를 졸업한 정명원은 공이 무지하게 빨랐던 투수였다. 하지만 그에게 제구력은 없었다.
1989년 드래프트에서 연고 팀인 해태로부터 외면당하는 대신 태평양에 지명받았다. 그런데 그를 스카우트했던 신현철씨가 구단을 떠나자 정명원과 계약이 흐지부지됐던 것. 이에 정명원은 실업팀 농협에 입단을 결정했으나 뒤늦게 김성근 감독의 요청으로 돌고래의 일원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태평양에 입단한 정명원은 김성근 감독을 만나 제구력이라는 날개를 달았다.
무명용사 정명원은 1989시즌 최창호-박정현과 트로이카를 이루며 38경기(선발 18경기)에 출장 11승 4패 6세이브 139.1이닝 평균자책점 2.45를 기록했다. 인천 연고 팀 역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데 주역으로 활약했다.
『1989시즌은 KBO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준플레이오프가 시작됐다. 그 수혜를 받은 팀이 바로 태평양이었다. 물론 태평양은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꺾고 해태가 기다리던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3전 전패로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됐다.』
화려했던 1989시즌을 뒤로하고 맞이한 1990시즌은 그에게 어둠이 드리워졌다. 연봉 협상이 길어지면서 스프링캠프 참가 역시 늦어졌다. 그 결과 훈련 부족과 부상이라는 후유증이 찾아왔다. 태평양은 다시 제자리(?)로 갔고, 정명원은 1990시즌 15경기 2승 4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7.57이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1991년 정명원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마구잡이로 등판했다. 그래도 그는 약체팀의 희망이었다. 1991시즌 49경기(선발 5경기)에 등판하며 12승 6패 14세이브 132이닝 평균자책점 2.25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긴 악몽의 시작점이었다.
『김성근 감독 시절에도 정명원은 마구잡이로 등판했다. 단 그에게 제구력이라는 날개를 달아준 것은 김성근 감독의 공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박영길 감독은 달랐다. 그는 인간 백정과 가까웠다. 어쩌면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을 박살 낸 인물은 박영길 감독이었을 수도…물론 당시 팬들도 그렇게 말을 했지만 사실 현시대의 잣대로 그 시절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시절에는 선발/마무리의 구분도 없었고, 그 옛날 야구는 다 그랬기 때문이다. 그냥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라고밖에…』
1992년 정명원의 시즌 출발은 매우 좋았다. 4월 한 달 동안 3승 1패로 더는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팔꿈치가 말썽을 일으켰다. 전력에서 이탈 후 20일 만에 마운드에 올랐지만 단 1이닝 만에 강판당했다. 그리고 정명원은 1992시즌 7경기 3승 1패 38.1이닝 평균자책점 3.52로 일찌감치 시즌을 마감했다.
알 수 없는 미래만 기다리는 상황.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정동진 감독을 만난 것이다. 1992년 정명원은 구단과 지루한 싸움 끝에 수술대에 오르게 됐다. 그런데 정동진 감독은 정명원을 찾지 않았다. 정동진 감독은 자신의 감독직이 위태로운 상황에도 뚝심 있게 기다렸다. 태평양은 1993년 압도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런데도 정명원과 정민태는 보이지 않았다. 시즌 막판 그는 마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3시즌 단 2경기 등판 6이닝을 던지며 1패 평균자책점 1.50이라는 무의미한 성적만 냈을 뿐이다.
그러나 정명원의 끈질긴 재활과 정동진 감독의 뚝심은 ‘수호신 정명원’을 만들었다.
화려한 부활, 열혈 마무리로 변신하다
모든 것이 미지수였던 1994시즌 하지만 그 끝은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정동진 감독은 정명원을 선발이 아닌 마무리로 기용했다. 현대 야구처럼 완벽한 1이닝 마무리는 아니었지만, 정명원은 돌핀스의 마무리를 책임지는 굳건한 투수가 됐다. 1994시즌 태평양의 돌풍과 함께 정명원은 50경기에 등판 4승 2패 40세이브 105.2이닝 평균자책점 1.36으로 커리어하이를 넘어 인간 승리를 연출했다. 특히 정명원은 KBO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40세이브를 달성했고, 한 시즌 최다 세이브 포인트(구원승+세이브)기록도 갈아치웠다.
불같은 강속구와 190cm에 육박하는 큰 키에서 떨어지는 포크볼을 앞세운 정명원은 팀이 리그 2위로 이끄는 주역이었다. 참고로 당시 태평양은 선발 5명 중 4명이 10승 이상을 기록했고, 마무리는 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정명원이 버티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천 ‘짠물 야구’를 제대로 보여준 시즌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정명원은 KBO리그에서 가장 완벽하고 강력한 포크볼을 던진 투수 중 한명이었다. 일명 반포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완벽한 그립과 타자 머리에서 떨어지는 그의 포크볼은 폭포수와 같은 위력을 자랑했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3전 전승으로 격파하고 올라간 한국시리즈. 팀이 2연패로 벼랑에 몰린 3차전 역투하던 정민태를 대신해 일찌감치 마운드에 올랐다. 아마도 정동진 감독은 확실하게 경기를 따내겠다는 의중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은 돕지 않았다. 아니 이미 정명원의 구위는 정규시즌 강력했던 때와 달랐다. 정명원이 마운드에 올라가 막아낸 것이 아니라 LG 타자들을 버티지 못하고 역전을 허용했다. 그 결과 태평양은 1승도 못하고 4전 전패로 준우승에 머무르게 됐다.
비록 준우승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정명원은 생애 첫 구원왕 타이틀과 함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최고의 한 해로 1994년을 마무리했다.
『7월인가 8월로 기억하는 여름이었다. KBS1에서는 ‘금요나이트’라는 이름으로 금요일에 공중파에서 야구 중계할 때였다.
LG와 잠실 경기였는데 상대 전적에서 압도당하던 태평양이 모처럼 승리를 챙길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마무리 상황에서 정명원이 등판했다. 그런데 수호신 정명원은 없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그의 얼굴은 너무도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아마도 이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리고 계속해서 볼넷을 허용하더니 급기야 밀어내기 실점까지 했고, 역전을 허용하면서 경기는 LG의 승리로 끝났다. 이미 그의 구위가 많이 떨어진 것.
지금은 고인이 된 하일성 위원은 당시 중계하면서 마무리 투수가 90이닝을 넘게 소화하면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 마무리 멘트도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그런데 이날의 악몽이 한국시리즈에서도 재현될 줄은…』
더욱 안타까운 것은 1994년을 정점으로 구위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1995시즌에는 팀이 곤두박질쳤다. 그런데도 52경기에 등판 9승 7패 19세이브 103이닝 평균자책점 1.75를 기록했다. 나쁘지 않은 기록이었지만 구위는 많이 떨어진 것. 그래서 더는 강력한 마무리 정명원은 없었다.
(계속...)
'현대왕조 > 왕조의 주역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타준족의 대명사 '리틀쿠바' 박재홍 (1) (2) | 2024.07.19 |
---|---|
유니콘스 '불꽃 남자' 정명원 (2) (0) | 2024.07.18 |
인천의 4번타자 '고릴라' 김경기 (2) (0) | 2024.07.16 |
인천의 4번타자 '고릴라' 김경기 (1) (0) | 2024.07.15 |
현대 유니콘스의 '영원한 에이스' 정민태 (3) (1) | 2024.07.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