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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왕조/왕조의 주역들

호타준족의 대명사 '리틀쿠바' 박재홍 (1)

by 특급용병 2024.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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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연고 역사에서 팬들의 뇌리에 강타자로 평가받는 선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인천 연고 팀은 전통적인 약체 팀이었다. 어쩌면 인천 팬들이 강타자라고 하는 타자들은 다른 팀에서는 평범한 선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왕조의 시작과 함께 인천 팀에도 진짜 강타자가 탄생했다.

 

176cm 82kg 작지만 탄탄한 체구의 그는 전에 볼 수 없었던 폭발적인 타격으로 인천 팬들을 열광시켰다.

 

. . .

 

그는 현대 유니콘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전설이었다. 어쩌면 짧지만 강렬했던 유니콘스처럼 그는 짧지만 강렬했던 인상을 남기고 팀을 떠난 현대 팬들에게는 영원한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다.

 

 

괴물의 공습경보 강렬했던 1996시즌

 

삼성과 재계 1-2위를 다투던 현대가 프로야구에 들어오려고 하자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 결과 현대는 실업팀을 창단하게 되는데 그 팀이 현대 피닉스였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대학야구 최고의 선수들을 모조리 스카우트했다. 그리고 그 당시 실업 현대에 입단했던 인물 중 한 명이 박재홍이었다. 그런데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하고 1996년부터 리그에 참가하게 되자 현대 피닉스 선수들을 지명한 프로팀으로 돌려주기로(?) 했다.

 

어쨌든 1995년 실업팀 현대 피닉스와 계약한 박재홍은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하면서 사상 첫 1차 지명권 트레이드를 통해 프로팀 현대 유니폼을 입었다. 참고로 박재홍은 해태에 지명을 받았던 선수였다. 모두가 현대의 꼼수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KBO리그의 7개 구단도 뭐아무튼 공식적인 입단 조건은 실업 현대에서 받았던 계약금과 연봉으로 발표해 총액 45천으로 역대 야수 최고 대우이자 전체 3위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박재홍이 해태행을 거부했다는 설도 있었다. 물론 이는 해태와 기자들의 날조였다. 그 당시 선수에게 그런 권한은 없었다. 이는 박재홍도 유튜브 방송을 통해 밝혔던 부분이다.

 

또 다른 설은 당시 박재홍이 해태에 현대와 비슷한 대우를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해태는 “()종국이도 2억인데 그 이상을 줄 수 없다.”라는 태도로 계약이 불발됐다는 것.

 

중요한 사실은 선수가 팀을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박재홍이 해태 선수가 됐다면 야구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박재홍이 현대에 입단하자 김재박 감독은 그의 포지션을 놓고 행복한 고민을(?) 했다. 박재홍의 입단은 팀의 최대 약점인 2루 문제와 1번 타자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재홍의 2루 수비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 결국 박재홍은 내야가 아닌 외야로 가면서 팀 공격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것은 신의 한 수가 됐다. 만약 박재홍이 2루나 3루로 시즌을 시작했다면 폭발적인 타격을 못 봤을 수도

 

1996시즌 개막전, 박재홍은 1번 타자로 데뷔전을 치렀다. 그런데 그는 괴상한 타자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타석의 가장 앞쪽에 서면서 매우 넓은 스탠스를 취했다. 그리고 상체는 최대한 웅크리고 방망이를 등에 눕혀놓은 것 같았다. 마치 1루수를 향해 90도로 인사하는 것과 같은 자세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개막전 그는 무안타로 경기를 마감했다. 그리고 4월 한 달은 3할 이상의 고타율을 기록했다. 다만 장타력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그런 타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잠잠하던 그가 드디어 폭발하기 시작했다.

 

55일 어린이날 도원 야구장

 

롯데와 더블헤더에서 홈런 38타점을 몰아치면서 박재홍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런데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박재홍은 5월에만 무려 1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KBO리그는 박재홍 신드롬이 일어났다. 그는 단순히 잘하는 신인 선수를 넘어 KBO리그 역사상 최초의 30홈런-30도루를 달성한 인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박재홍이 브레이크가 걸리기 시작했다. 이는 김성근 당시 쌍방울 감독에 의해서였다. 김성근 감독은 박재홍의 타격폼에 대해 시비를 걸기 시작하며 부정 타격을 주장했다. 그러자 백인천 감독도 덥석 물었다. 여기에 김응룡 감독까지 가세하면서 박재홍은 완전하게 흔들렸다. 본인은 개의치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43홈런 10타점 타율 0.353을 기록했다. 이어 510홈런 35타점 0.339의 타율을 기록했던 박재홍. 그러나 6월 들어 박재홍은 5홈런 16타점 여기까지는 뭐 나름그러나 타율은 무려 0.193을 기록했다.

 

당시 KBO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에 자문을 요청했다. 그런데 미국은 문제없다고 답을 했으나 일본은 부정 타격이라고 답했다. 결국 박재홍이 타석에서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국내 언론은 박재홍도 어쩔 수 없는 신인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김성근 감독에 의해 브레이크가 걸린 박재홍은 김성근 감독이 보는 앞에서 3방의 홈런을 치며 부진에서 벗어났다. 이후 다시 박재홍은 달리기 시작했다. 7월 청주에서 시즌 20번째 홈런을 기록하며 역대 최단 경기(75경기) 20-20을 달성하면서 그의 방망이는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미 산술적으로는 8월 중순이면 30-30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기록을 의식했던 것일까? 다시 한번 고비가 찾아왔다. 고대하던 홈런이 끊기면서 대기록 달성은 9월로 넘어가게 됐다. 또한 3할의 벽도 깨지면서 2할대로 추락했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침내 그는 역사가 됐다. 199693일 잠실 LG, 박재홍은 LG 김용수를 상대로 시즌 30번째 홈런을 기록하면서 KBO리그 역사상 30-30클럽의 창설자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1996년은 현대 박재홍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한 해였다. 박재홍은 데뷔 첫해 126경기 전경기 출장 142안타 30홈런 108타점 36도루 타율 0.295를 기록했다. 3할을 달성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지만 신인으로 홈런과 타점왕에 올랐다. 참고로 박재홍의 30홈런은 역대 신인으로 한 시즌 최다 홈런(종전 27개 김기태)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전통적으로 대형 타자가 없었던 인천 연고 프로팀에 어마무시한괴물 타자가 탄생한 것은 현대 팬들에게는 최고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가을 무대에서 박재홍의 방망이는 식어버렸다. 한화와 준플레이오프에서 감이 좋았던 그는 쌍방울과 플레이오프에서 2안타 1홈런 1타점으로 타율 0.133에 그쳤다. 아무래도 그쪽 감독이더 문제는 한국시리즈였다. 22타수 2안타 1홈런 1타점 타율은 0.091에 그친 것이다. 대신 삼진은 무려 6. 박재홍의 방망이가 조금만 살아났어도

 

어쨌든 1996시즌 박재홍은 화려하게 데뷔해 신인왕, 골든글러브 수상을 하며 새로운 스타 탄생을 알렸다. 심지어 중학교 겨울 방학 책에도 나올 정도였으니 1996년은 박재홍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즌 MVP는 구대성이 받았다. 물론 투수로 4관왕. 대단한 성적이었다. 그런데 박재홍이 기자들과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신인왕-MVP 동시 석권이 불가능했다고 본다. 한국 기자들의 성향이라면 홈런왕 그리고 최초의 30-30이라면 끝 아닌가? 지금도 박재홍은 기자들에 대해 욱하기도…』

 

현대의 대표 타자 그리고 강렬했던 5시즌

 

충격이라는 말밖에 대신할 표현이 없을 정도의 데뷔 시즌을 보낸 박재홍은 두 번째 시즌도 변함이 없었다. 물론 허리 부상으로 경기에 빠지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2년생 징크스라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나왔다. 하지만 딱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아니었다. 박재홍의 공격력은 더 정교해졌다.

 

1997시즌 박재홍은 전반기 홈런 1231타점 도루 10개를 기록했다. 물론 부상으로 경기 출전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전반기 타율이 무려 0.331이었다. 그리고 후반기에도 감은 떨어지지 않았다. 홈런 1538타점 도루 12개 타율 0.323을 기록하는 등 2년 연속 20-20을 달성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부상만 없었다면 2년 연속 30-30도 가능했고, 역시나 부상만 없었다면 오히려 데뷔 시즌보다 더 화려한 성적을 남겼을 것이다.

 

참고로 데뷔 시즌에는 계약이 늦어져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지 못하는 바람에 체력적으로 어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1997시즌은 달랐다. 분명 아쉬움도 있었지만 96경기 출장 108안타 홈런 2769타점 도루 22개 타율 0.326을 기록하며 데뷔 첫 3할을 달성했다.

 

그리고 데뷔 3년차 시즌 박재홍은 다시 한번 역사를 쓴다. 박재홍은 1998시즌 박재홍은 119경기에 출장 114안타 홈런 3084타점 도루 43개와 타율 0.266을 기록했다. 분명 타율은 앞선 두 시즌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3년 연속 20-20은 물론 커리어 두 번째 30-30을 달성했다. 박재홍은 개인 기록도 기록이었지만 생애 첫 정규리그 우승을 경험하게 됐다.

 

또한, 데뷔 시즌 철저하게 묶였던 것과 달리 커리어 두 번째 한국시리즈에서는 6경기 23타수 9안타 홈런 24타점 타율 0.391을 기록하며 팀 창단 첫 통합 우승을 달성하는데 중심에 서게 됐다. 그리고 보너스로 3년 연속 골든글러브도 수상했다.

 

1999시즌은 너무도 아쉬운 시즌이었다. 큰 부상도 없었다. 그리고 129경기나 소화했다. 그러나 박재홍은 142안타 홈런 2498타점 도루 17개 타율 0.295를 기록했다. 물론 준수함 혹은 이전과 비슷한 성적을 남긴 것은 맞다. 다만 타고투저 아니 타신투병시즌이라고 할 수 있었던 1999년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상하게 힘을 받지 못했던 시즌이었다.

 

참고로 한 시즌 홈런 10개도 힘들던(?) 타자들이 20-30개를 치던 그런 시즌이었다. 그런데 박재홍은 도대체 왜? 그래서 세부 지표를 떠나 박재홍의 1999시즌은 부진한 시즌이라고 밖에이건 객관적인 평가보다 팬심에 의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새천년 박재홍은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다. 사실 부활이라기 보다 박재홍은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이었다.

 

2000년 현대는 KBO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으로 남았다. 그리고 박재홍도 여전히 현대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2000시즌 박재홍은 132경기에 출장해 151안타(커리어 하이) 홈런 32115타점 도루 30개 타율 0.309을 기록했다. 프로 두 번째 3할과 타점왕 그리고 커리어 네 번째 20-20, 세 번째이자 마지막 30-30을 달성했다.

 

결과적으로 현대는 우승했다. 그리고 박재홍도 개인 통산 두 번째 우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2000년 가을에 박재홍의 방망이는 다시 얼어붙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박재홍은 현대에서 첫 5시즌 동안 602경기 출장 657안타 143홈런 474타점 148도루 타율 0.297을 기록했다. 20-20클럽 4, 30-30클럽 3회 누구보다도 활활 타올랐으나 괴물 박재홍의 모습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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