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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왕조/왕조의 주역들

현대 유니콘스의 '영원한 에이스' 정민태 (2)

by 특급용병 2024.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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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왕조의 최초의 에이스 탄생

 

1995시즌이 끝나고 정민태는 오릭스 가을 캠프에 참가하게 됐다. 그리고 일명 아리랑볼로 불리는 슬로커브를 장착했다. 이는 단순히 구종 장착을 넘어 힘으로만 밀어붙이던 스타일에서 완급 조절이라는 기술을 장착하는 계기가 됐다.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 첫해였던 1996년 정민태는 위재영과 원-투 펀치를 이루면서 현대 마운드를 책임졌다. 그리고 정민태는 박재홍과 함께 팀 창단 첫해 돌풍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996시즌 30경기에 등판한 정민태는 210.1이닝을 책임지며 159패 평균자책점 2.44를 기록. 프로 데뷔 첫 두 자리 승리와 함께 200이닝을 돌파했다. 이는 명실상부한 현대 최초의 에이스로 출발하는 시즌이었다.

 

정민태의 눈부신 활약은 가을 무대에서도 계속됐다. 현대는 창단 첫해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리고 한화를 만나게 된다. 이때 정민태는 2경기에 등판 11세이브로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그리고 쌍방울과의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에 등판해 단 2실점만 하면서 1세이브를 기록.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참고로 당시 현대는 KBO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서 2연패 후 3연승으로 리버스 스윕을 달성했다.

 

마지막 관문이었던 해태와 한국시리즈, 현대 마운드에는 정민태밖에 없었다. 해태 천적 위재영이 1차전 철저하게 무너지면서 정민태는 2차전을 책임져야만 했다. 비록 정민태는 승리 투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조계현과 명품 투수전을 펼치면서 무서운(?) 해태 타선을 철저하게 잠재웠다. 22패로 균형을 맞춘 5차전. 시리즈 두 번째 선발 등판을 했다. 물론 나름 좋은 피칭을 했다. 다만 승리와 인연이 없었고, 6차전에서 또다시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1997시즌 준우승 후유증이었는지 현대는 주력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으로 7위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정민태는 달랐다. 홀로 외롭게 싸웠던 시즌이었다. 31경기에 등판 무려 219이닝을 소화하며 1313패 평균자책점 3.33을 기록했다. 특히 8번의 완투로 본인의 최대 완투를 기록한 시즌이었다. 13패를 당한 시즌이었지만, 만약 팀이 정상적으로만 돌아갔어도 1996시즌보다 더 많은 승리를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더 견고해진 모습이었다.

 

20세기 마지막 20승 투수

 

현대에서 세 번째 시즌이었던 1998시즌은 정민태 커리어에 있어서 최고의 구위를 자랑하던 시즌이었다(개인적으로는 투수 정민태의 최전성기 시즌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사석에서 물어본 결과 본인도 1998년이 기량이 정점에 올라선 시기였다고 밝혔다).

 

1998시즌 현대는 리그를 압도하는 팀이 됐다. 그리고 정민태는 그런 팀의 마운드를 이끄는 에이스였다. 정민태는 28경기 등판 200.2이닝을 소화하며 179패 평균자책점 2.83로 팀을 넘어 리그에서 부동의 에이스로 우뚝 선 시즌이었다. 특히 17승이라는 숫자보다 ‘9를 어떻게 당했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초절정의 구위를 자랑하던 시즌이었다. 정민태는 17승으로 다승 2위에 올랐다. 그러나 사실 LG가 김용수를 다승왕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작전(?)을 펼치면서 아쉽게 타이틀을 놓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는 인천 연고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직행을 달성했고, 정민태는 다승왕 실패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리고 만난 LG와 한국시리즈. 사실 현대는 압도적인 시즌을 보내면서도 LG에게는 약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정민태 역시 LG와 승부는 늘 어려웠다. 하지만 가을의 정민태는 초인에 가까웠다.

 

LG와 한국시리즈 1차전, 4차전 선발 등판과 6차전 마지막 투수까지 3경기에 등판 무려 17.2이닝을 소화하며 단 1실점으로 21세이브 평균자책점 0.51로 그야말로 언터처블과 같은 모습이었다. 비록 다승왕은 놓쳤지만, 팀 창단 첫 우승과 한국시리즈 MVP 그리고 생애 첫 골든 글러브를 따내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정민태에게 1998시즌은 구위가 정점에 올라선 시즌이었다면 1999시즌은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시즌이었다.

 

1999년은 초절정의 타고투저시즌이었다. 요즘 말로 탱탱볼 시대였다. 한 시즌 홈런 10개를 칠까 말까 하던 타자들이 20-30개를 우습게 치는 시즌이었다. 선발 투수는 리그에서 찾아봐도 없던 그런 시즌이었다. 오히려 진필중-임창용-구대성 등 마무리 투수라고 하지만 중무리에 가까운 투수들의 시대였을 정도였다. 다시 말해서 불펜 투수들이 갈리던 그런 시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민태가 더 위대했던 시즌이었다. 전반기만 하더라도 그의 최종 승수는 20승이 아닌 20+@로 예상은 물론 충분히 가능할 정도로 좋은 페이스였다. 다만 그러나 후반기 허벅지 부상과 타선의 침묵으로 20승 초과 달성에는 실패한 것. 무엇보다도 말도 안 되는 양대 리그라는 어이없는 제도로 인해 마무리 투수로 알바(?)를 뛴 것도 20승 초과 달성 실패의 이유였다.

 

1999시즌 정민태는 33경기 등판, 무려 230.2이닝을 소화하며 2073세이브 2.5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사실상 나만 선발 투수다.”를 연출했던 시즌임은 물론 1995년 이상훈 이후 4년 만에 선발 투수로 20승 달성과 20세기 마지막 20승 투수로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프로 첫 다승왕과 함께 2년 연속 골든 글러브 수상을 하면 한국 최고의 투수로 우뚝 섰다. 만약 이승엽이 우즈가 세운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갈아치우지 않았다면 정민태가 MVP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구원승 1승이 포함되어 있다고 기록을 깎아내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 시절 야구를 봤던 팬들이라면 정민태에 대해서 함부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표현이라면 꼰대라고 할 수 있지만사실을 사실로 말하는 것이다. 과거 야구를 모르는 팬들 가운데 무조건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서 말하는 것이다. 당시 정민태는 구원으로 나와 1-2이닝 던지고 승리를 챙긴 것이 아니다.

 

특별히 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였음에도 3세이브를 기록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팀이 매우 어려웠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양대리그 제도의 최대 피해자로 현대는 가을 야구를 위해 정민태를 마무리로 쓰는 초강수를 뒀던 시즌이다. 참고로 양대리그가 아니었다면 현대는 가을 야구를 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양대리그를

 

어쨌든 당시 1승이 구원승이었지만 무려 6이닝을 던졌다. 물론 순수하게 선발 20승은 아니었다. 그러나 20승을 폄하할 수 없다. 구원 1승도 선발처럼 이닝을 소화했고, 만약 그런 것이 인정하지 못할 이유라면 1997년 쌍방울 김현욱이나 1995년 이상훈 이전의 투수들은?

 

리그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정민태는 해외 진출을 선언했다. 다만 당시 KBO와 구단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 당시에는 구단이 막으면 방법이 없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구단이 아닌 KBO가 막았다(훗날 정민태 본인이 밝혔지만 KBO에서 막았고, 본인은 집안 사정으로 해외 진출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어쨌든 현대는 2000년 우승한다면 반드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의 해외 진출은 1년 뒤로 미뤄졌다.

 

새천년 현대는 1998시즌보다 더 무서운 팀이었다. 특히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90승을 달성했고, 최종 성적 91승으로 KBO리그 한 시즌 최다승을 달성. 압도적인 시즌을 보냈다. 냉정히 말해서 마음만 먹었으면 100승도 가능했을지도

 

정민태는 임선동-김수경과 함께 황금 트로이카를 구축하며 2000시즌 29경기 188패 평균자책점 3.48207이닝을 소화하며 최동원 이후 역대 두 번째로 5년 연속 200이닝을 달성한 투수가 됐다. 또한, 사실 마음 먹고 밀어주기를 했다면 정민태의 2년 연속 20승이 가능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김수경-임선동도 20승이 가능했을 것. 하지만 시즌 막판 임선동-김수경이 다승왕을 차지할 수 있던 유리한 고지였으나 실패하면서 마지막 기회를 특정 선수에게 특혜가 아닌 공평하게 한 경기씩 돌아갔다. 그 결과 정민태는 다승 공동 1위로 통산 두 번째 다승왕이 됐다.

 

(지금도 이런 팬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는 비난은 김재박 감독이 다승왕을 만들어주기 위해 편법을 썼다고 하는 이들이었다. 몰아주기를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기회를 공평하게 줬을 뿐이다. 다만 3명이 17승인 상황에서 마지막 선발 등판에서 모두 승리를 챙겼다. 과연 이것이 승리 만들어주기 혹은 다승왕 밀어주기랑 무슨 상관인가?)

 

2000시즌도 말도 안 되는 양대 리그 제도가 시행됐다. 현대는 압도적인 시즌을 보냈음에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삼성과 만난 플레이오프에서 정민태는 2승을 따냈다. 그리고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정민태는 2경기에 등판했다. 그리고 1승을 따냈다. 하지만 구위는 정상적이지 못했다. 이미 2000시즌은 정점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그런 시즌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민태의 구위는 1998시즌이 정점이었다. 그 후에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통산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도 경험한 정민태는 골든 글러브 후보에는 올랐지만, 후배를 위해 사실상 사퇴(?) 선언을 했다. 어차피 본인은 받았었고, 일본 진출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민태는 현대에서 최고의 5시즌을 보내고 2000시즌 후 한국을 떠나 새로운 무대로 떠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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