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가 없어진 날, 내 야구 인생도 끝났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한 마디였다.
에이스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퇴식도, 영구결번식을 할 수 있는 팀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때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어떤 선수들은 한두 시즌 반짝해서 실력 이상으로 팬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리그를 지배했던 에이스였고, 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우완 투수였음에도 저평가받았다. 그리고 조롱받을 때도 팬들은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이것이 팬 없는 구단의 설움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항상 거침없는 피칭으로 승리를 안겨주는 그가 너무나 고마웠다.
정. 민. 태.
그는 현대 팬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고 누가 뭐라고 해도 현대를 넘어 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였다.
이제부터 시간을 돌려 현대 유니콘스의 ‘영원한 에이스’ 정민태를 추억하려고 한다.
화려한 데뷔전, 그리고 사라진 슈퍼 루키
1992년 2월, 태평양 팬들에게도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시속 150km가 넘는 광속구(?)를 자랑하는 국가대표 투수가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계약금 1억 6천, 연봉 1천 2백, 총액 1억 7천 2백. 당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었고, 신인 최고 계약금이었다)을 받으며 돌핀스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평양도 선동열과 같은 초대형 투수가 입단했다는 것은 단순히 10승, 15승을 기대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도 태평양 팬들에게는 천하(?)를 다 가진 것과 같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드디어 1992시즌이 개막했고, 4월 22일 인천 도원 구장에서는 역사적인 일이 펼쳐졌다.
쌍방울과 더블헤더 1차전에 드디어 ‘슈퍼 루키’ 정민태가 선발로 등판했다. 그리고 이날의 등판은 태평양 팬들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경기 시작과 함께 4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6.2이닝 2실점으로 프로 데뷔 첫 승을 따낸 것이다. 승리에 갈증을 느끼다 못해 목이 타들어 가던 태평양 팬들은 “올해는 갈 수 있다.”라는 가을 야구의 기대감까지 심어줬다.
하지만 이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데뷔전에서 삼진을 잡으려고 무리한 결과, ‘화려한 커리어의 시작’이 아닌 ‘팔꿈치 인대 파열’이라는 절망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민태는 시즌을 조기에 마감하고 미국으로 날아가 수술대에 오르게 됐다.
1승 3패 평균자책점 3.81…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였다. 특히 KBO 역사상 최고 몸값을 받은 신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가 마운드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1993시즌 개막을 앞두고 언론에서는 정민태가 4-5월이면 돌아올 것이라고 알렸다. 하지만 그의 복귀 시기가 점점 미뤄졌다. 그러면서 어느덧 그의 존재는 완전히 지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팀은 압도적인 성적(?)으로 리그 최하위를 확정. 더는 의미 없는 시즌을 보내고 있던 시즌 막판. 정민태는 마운드에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고작 5경기를 뛰며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6.75를 기록하며 프로 두 번째 시즌도 그렇게 마감했다.
이제 정민태를 기다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억대 계약금을 받고도 부상으로 사라진 ‘비운의 선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끝났다.’라는 말만 되풀이됐을 뿐이다(훗날 밝히기로는 언론도 언론이지만 재활하는 동안 팀에서도 그에 대한 눈초리가…어쨌든 그는 통증이 있었는데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피칭을 한 결과…).
1994시즌을 앞두고 정동진 감독은 정민태는 물론 정명원도 기용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이미 앞선 시즌에서도 그랬기 때문이다.
부활과 희망
1994년 4월 14일 대전에서 한화와 태평양의 경기가 있었다.
(당시 평일이었지만 낮 2시 경기로 치러졌다. 당시에는 4월에 개막하면 2-3주 정도는 평일이지만 낮 2시에 경기를 했다. 이유는 추위 때문에 야구 하기/보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나이트 게임을 안 한 것. 참고로 나이트게임이라는 표현도 과거에는 대부분 즐겨 사용했던 용어다. 요즘에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아나운서도 이런 표현을 했고, KBS에서는 ‘금요 나이트’라는 타이틀로 중계를 하기도…)
이날 선발로 등판한 정민태는 핵-물 타선(?)이 간신히 뽑아준 1점을 지키며 역투하고 있었다. 1-0으로 살얼음판을 걷던 경기는 어느덧 9회말 2아웃까지 진행됐다. 하지만 상황은 만루였다. 정민태는 이미 마운드를 내려갔고, 벤치에서 초조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마운드에는 불안한 제구력으로 위기를 자초한 정명원이 서 있었다.
“딱”
파열음과 함께 타자가 친 타구가 3-유간으로 흘러갔다. 이때 유격수 염경엽이 잡아서 1루에 힘겹게 송구……심판의 손이 올라가면서 비로소 경기가 끝났다.
정민태의 시즌 첫 승이자 프로 데뷔 두 번째 승리였다. 1992년 4월 22일 승리 이후 두 번째 승리까지 무려 723일이 걸렸다. 정민태는 이날의 승리를 계기로 부상의 악몽에서 탈출하며 진짜 커리어가 시작됐다.
참고로 이 경기는 ‘부활 매치’였다. 태평양 정민태-정명원이 등판했고, 상대는 1993년 입단해 부상으로 시즌을 날렸던 2년차 좌완 투수 구대성이 선발로 나와 1실점 완투패를 당했다.
정민태는 더는 부상으로 마운드를 떠나지 않았다. 1994시즌 25경기에 등판한 그는 145.1이닝을 책임지며 8승 9패 평균자책점 3.72를 기록했다. 비록 팀 선발 5명 가운데 유일하게 10승을 올리지 못했지만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의 진가는 가을 무대에서 발휘됐다.
‘태풍 태평양, 돌풍 돌핀스’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태평양은 1994년 돌풍을 일으키며 정규시즌 2위를 차지했다. 상대적으로 3위 한화보다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열세로 평가받았지만, 플레이오프 3경기를 모두 싹쓸이하며 인천 연고 역사상 첫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4번 타자 김경기와 정민태가 있었다. 특히 정민태는 플레이오프 2차전 선발로 등판해 8이닝 무실점 역투를 펼쳤다.
태평양은 한국시리즈에서 시즌 상대 전적 5승 13패로 절대적으로 밀린 LG를 만났다. 1차전 김홍집의 눈물의 완투패, 2차전 대패로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분위기. 그런 상황에서 3차전 정민태가 선발로 등판했다. 정민태는 강력한 LG 타선을 상대로 5.2이닝 동안 단 2개의 안타만을 허용했다. 여기에 팀 타선도 4점이나 뽑아냈다. 이대로만 가면 홈에서 반격의 1승이 가능했다. 그런데 태평양 벤치는 마무리 정명원을 조기 등판시켰다. 이것은 정민태의 승리를 날리는 결과는 물론 태평양의 역전패의 원흉이 됐다. 만약 3차전에서 정민태에게 1이닝 정도만 더 맡겼다면 3차전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어쨌든 태평양의 첫 번째 도전은 4전 전패로 끝났다. 너무 아쉬움이 많았던 시즌이었다. 그러나 1994시즌은 정민태가 건강하게 돌아왔고, 한 시즌을 문제없이 보냈다는 것은 정민태에게 매우 값진 한 해가 됐다.
정민태는 1995시즌 28경기에 등판해 8승 14패 188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했다. 매우 아쉬운 기록으로 볼 수 있지만, 전년도 준우승팀의 면모(?)는 사라지고 다시 박살 난 태평양. 그런데도 정민태는 굳건하게 마운드를 지켰다. 팀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8승을 따낸 것은 10승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그 시절 태평양은 마운드에 정민태-위재영, 타자 중에는 강영수-권준헌만 야구 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던 시즌이었다.
그런데 정민태와 태평양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났다. 시즌 중에 팀 매각설이 돌았는데 결국, 태평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구단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의 시작은 정민태가 새롭게 태어나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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