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한국시리즈 9차전…
폭우가 내리는 상황 속에서 모두가 숨을 죽이고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9회말 2아웃, 스코어는 8-6, 현대가 리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운드에는 한국시리즈 평균자책점 제로 행진을 하던 철벽 마무리가 서 있었다.
“딱”
파열음과 함께 삼성 신동주의 타구가 내야에 높게 떴다. 빗속의 혈투, 초유의 한국시리즈 9차전의 혈투는 이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수비 귀신’ 박진만이 강한 빗줄기에 그만 평범한 플라이를 놓쳐 버린 것이다. 그 사이에 루상의 주자들이 한 베이스씩 진루하면서 삼성이 1점을 만회했다.
8-7.
이제 동점이 문제가 아니라 삼성이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흐름이었다. 현대 팬들은 아웃 카운트 1개를, 삼성 팬들은 안타 하나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긴장하고 있을 때, 마운드 위에 그는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욱 냉정했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독기로 가득했다.
“딱”
강동우의 타구가 진흙탕을 해치며 1루 쪽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타구를 잡은 이숭용. 그는 1루 베이스를 향해 전력 질주하며 마침내 베이스를 밟았다. 그제야 마운드에 있던 그도 환호성을 지르며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조. 용. 준.
그는 마치 현대 유니콘스의 운명처럼 짧지만 강렬했던 임팩트를 남겼던 인물이다. 그래서 여전히 그가 그립고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유니콘스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마무리 투수였다.
혜성처럼 등장한 ‘조라이더’ 조용준
연세대를 졸업한 조용준은 2002년 현대 유니콘스 역사상 가장 많은 계약금(5억 4천만 원)을 받고 프로에 입단했다. 국가대표 에이스로 활약했던 그가 과연 프로에서 어떤 위치에서 활약할 것인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런데 현대 코칭스텝은 ‘선발’ 조용준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었다. 이미 대학시절 많은 투구와 부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긴 이닝을 소화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은 이들 그리고 김재박 감독을 싫어하는 이들은 현대에서 혹사로 조용준의 전성기가 짧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대학 시절부터 어깨가 좋지 않았고, 수술 전까지 어깨 물혹 등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입단 첫해도 물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 알려졌었다. 과거 모 블로거에 의해서 현대에서의 혹사로 알려졌지만 대학 야구를 봤거나 조사만 해도 사실은 다 알 수 있다는 것…실제로 현대 팬들 가운데 대학 야구에 관심이 많던 이들은 조용준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결국 조용준은 특별한 보직이 없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필승 카드가 그의 역할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학 최고 투수, 심지어 모기업의 가세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팀 역사상 최고 계약금을 받은 투수가 1군에서 계투로 뛰는 것은 아쉬웠다. 하지만 어쨌든 그의 기량만큼은 ‘찐’이었다.
조용준은 당시 외국인 마무리 투수 베라스와 함께 현대 불펜을 책임지면서 평균자책점 ‘제로’ 행진을 이어갔다. 그런데 영원할 것(?) 같았던 베라스의 무적행진이 깨지더니 갑자기 다른 투수가 됐다. 그 결과 현대는 베라스를 퇴출했고, 그 자리에 조용준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마무리 조용준의 시대’ 그리고 ‘조라이더’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불꽃 같았던 일각수의 슈퍼 마무리의 3년
150km에 육박하는 빠른 볼과 140km가 넘는 고속 슬라이더를 앞세운 조용준은 2002시즌 가장 뜨거운 신인이었다. 아니 신인을 넘어 현대의 또 다른 중심이 됐다. 그리고 그에게는 ‘조라이더’라는 닉네임이 붙여지기도 했다. 그 정도로 현대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프로 첫해 조용준은 9승 5패 28세이브 평균자책점 1.90을 기록하며 37세이브포인트로 구원 부문 타이틀 홀더가 됐다. 그리고 고졸 루키 김진우를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하며 2관왕에 오르며 모처럼 프로판에 괴물 루키의 탄생을 알렸다.
첫해 너무 많이 던진 것이었을까? 아니면 시한폭탄이었던 어깨의 문제였을까? 조용준의 두 번째 시즌을 매우 어려웠다. 물론 단조로운 구종과 상대의 분석, 반대로 말하면 상대를 제압할 준비가 덜 됐었다. 입단 첫해 중간에서 뛰다가 마무리로 뛰었기 때문에 이닝 등 여러 부분에서는 직접적인 비교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전혀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2003시즌 조용준은 47경기 2승 7패 26세이브 1홀드 53.2이닝 평균자책점 3.52를 기록했다. 2002시즌과 너무 다른 성적. 팬들은 불안과 우려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보다 시한폭탄 같은 그의 어깨 때문이었다. 조용준은 한국시리즈에서도 불안했다. 1차전 세이브를 따냈지만 3차전 3-3이던 8회말 등판해 김민재에 3루타, 조원우에게 안타 등을 허용하면서 패전 투수가 됐다. 이후 정민태의 역투로 팀은 우승을 차지했다. 어깨 이상, 떨어진 구속. 아마도 신철인-이상열-권준헌이 없었다면 2003년 현대가 통합 우승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성의 조용준이 아니었던가? 2004시즌 조용준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우울하게 표현하면 완전하게 불꽃을 태워버렸다. 조용준은 좌타자를 상대하게 위해 써클 체인지업을 장착했다. 이것은 우리 가슴에 ‘조라이더’ 조용준을 새겨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는 전년도에 이어서 정규 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2003년 무서웠던 심정수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고, 무엇보다 에이스 정민태가 다른 사람이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현대에 조용준이 있었다. 2004시즌 조용준은 63경기에 등판 10승 3패 34세이브 75이닝 평균자책점 2.28을 기록했다. 다만 2004년부터 세이브 포인트가 폐지됐기 때문에 세이브 부문 2위로 세이브 타이틀을 따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설움(?)을 한국시리즈에서 풀었다. 2004년 한국시리즈는 사상 최초로 9차전까지 펼쳐졌다. 앞으로 한국시리즈 9차전은 KBO 역사에서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용준이라는 이름은 영원히 남는 그런 시리즈였다.
한국시리즈 9경기 동안 7경기에 등판한 조용준. 12.1이닝을 던지며 단 2실점. 이것도 비자책점으로 그의 평균자책점은 ‘0’이었다. 특히 9차전에서 팀을 위기에서 구하며 한국시리즈 3세이브로 MVP를 수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용준의 시대가 열리는 줄 알았다.
사라진 조라이더…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2004년 우승 직후 FA로 주력 선수들의 이동과 외국인 선수들이 떠나면서 최악의 상황에서 2005시즌을 출발했다. 그러나 조용준은 늘 자신감 넘치는 피칭으로 팀의 마지막을 지켰다.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음에도 2005시즌 49경기를 뛰며 2승 1패 27세이브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했다. 시즌 한 때는 세이브 타이틀을 놓고 경쟁을 펼쳤으나 시즌을 일찌감치 마감하면서 세이브 2위에 머무르게 됐다. 하지만 최소 경기 100세이브 달성으로 아쉬움을 대신해야 했다.
『사실 100세이브 달성보다 앞으로 200세이브, 300세이브를 달성하는 선수가 되기를 많이 기대했다. 특히 오승환과 마무리로 좋은 승부를 꼭 펼쳐주기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2005년 이후 단 한 번도 오승환과 한 팀을 대표하는 클로저로 붙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뭐라고 말하기가…』
현대는 4강 탈락이 확정되자 조용준 어깨 수술을 결정했다. 데뷔 전부터 달고 있던 물혹을 떼어내고 ‘완전한 조용준’을 만들어 다시 도전하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분명 조용준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함께 수술대에 올랐던 베테랑 정민태보다 재활 속도가 늦었다. 1군은 물론 2군에서도 정상적인 피칭을 하지 못했고, 그의 복귀 소식은 기약이 없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2006년 현대는 없는 전력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하지만 조용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7년에도…그렇게 우리는 마무리 조용준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이 과정을 조용준이 직접 밝히기도 했지만…어쨌든 현대가 계속 존재했다면 조용준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를 옹호하는 것보다 그 이후의 팀이…』
결국 구단도 사라지고 조용준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복귀할 팀도 없었다. 창단한 센테니얼은 조용준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심지어 당시 포털 사이트에서 잘 알려진 유명한 블로거가 조용준이 잠적하고 야구를 그만둔 것처럼 소설을 그대로 보도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러는 모르겠다. 정말 현대로부터 무슨 큰 사기를 당한 것인지? 현대에 대해서는 없는 일도…지금도 마치 투사인 것처럼 행동하던데…』
다시 등장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히어로즈 유니폼을 입고 돌아온 그는 4년 만에 세이브를 달성했다. 하지만 2009시즌 조용준은 단 11경기에 등판해 1패 1세이브만 기록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끝이었다. 2010시즌 후 그는 팀에서 방출된 것이다. 전성기 기량은 사라졌지만, 그의 야구 재능이라면 충분히 다른 팀에서 마운드에 설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 조용준의 근황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마운드를 떠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어느 날 간암 수술했다는 소식을 알린 것이다. 이후 모 방송에 나와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음을 알리며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소리소문없이 은퇴한 조용준은 2013년 MBC 해설위원으로 등장했다. 박재홍이나 정민철 등이 활발하게 해설했던 반면 조용준의 해설위원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아마 야구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음이 전해졌고, 재능기부로 유소년 선수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근래에 유튜브 방송을 통해 그의 근황을 알리기도 했다.
강렬했던 현대 마무리 조라이더
엄밀하게 조용준의 전성기는 3시즌이었고, 그의 커리어는 사실상 현대에서 4시즌으로 마감된 것이었다. 어쩌면 짧은 전성기를 지냈고, 이른 나이에 마운드를 떠난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어쨌든 몸 관리를 철저하게 못 한 것은 사실이었다. 만약 그가 몸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면 지금쯤은 더 화려한 커리어를 남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2005년 입단한 오승환과 멋있는(?) 마무리 대결을 기대했지만 결국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2004년 한국시리즈를 혹사당한 것으로 꼽을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조용준 본인도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조용준은 현대에서 관리가 안 됐을 정도로 혹사당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불펜에 신철인, 권준헌, 이상열 등 다른 팀에서 마무리가 가능한 필승 카드들이 조용준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대 팬이었고, 조용준 투수의 팬이었다. 특히 2004년은 시즌의 2/3 이상을 현장에서 지켜본 기억을 바탕으로 프로에서 혹사를 외치기에는…』
제대로 된 마무리로 단 4시즌을 뛰었음에도 통산 115세이브를 남겼던 조용준. 강렬함 때문에 행복했지만, 그 강렬함 때문에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다. 175cm의 작은 체구. 그러나 다부진 몸. 유연한 몸으로 독특한 투구폼을 소유했고, 때로는 건방져 보일 정도로 승부욕이 강했던 조용준. 그래서 더 든든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라운드에서는 볼 수 없지만 ‘제2의 인생’을 누구보다 더 멋지게 살아가길 응원한다.
● 조용준
● 백넘버 : 51
● 1979년 3월 17일생
● 백초초-여수중-순천효천고-연세대
● 우완투수
● 1998년 신인 드래프트 2차 5라운드(현대)
● 소속팀 : 2002-2007 현대 -> 2008-2010 히어로즈
● 주요 경력
- 구원왕 1회(2002)
- 신인왕 (2002)
- 한국시리즈 MVP 1회(2004)
- 한국시리즈 우승 2회(200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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