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의 기둥 정민태가 팀을 떠나야 할 때도 굳건히 팀을 지켜줄 것 같았다. 그리고 KBO 통산 200승을 달성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를 ‘112’에서 멈추고 말았다. 분명 오래전에 은퇴한 선수다. 하지만 여전히 은퇴하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존재이기도 하다.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 승리 투수. 현대 팬들에게 ‘수경 언니’로 통했던 순백의 유니콘 김수경을 추억해 본다.
혜성처럼 등장한 무명의 안경 투수
1998년 인천고를 졸업한 김수경은 고졸 우선지명으로 현대 유니폼을 입게 됐다. 당시 김수경에 대해서 아는 인물도 없었고, 누구도 주목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당장 1군에서 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기존에 현대 투수들의 면면을 본다면 김수경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입단 당시 그의 빠른 볼의 구속은 1군에서 뛸 수 없는 수준이었던 터라 김재박 감독은 그를 캠프에서 제외했다. 다만 김용휘 단장이 우격다짐으로 집어넣었기에 갈 수 있었다.
『사실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김시진 코치의 강력 추천으로 그가 캠프에 갈 수 있었다고 알려졌다. 현대의 프런트의 능력은 훌륭했지만, 프런트가 무조건 우겼을지는…또한, 입단 당시 빠른 볼의 구속이 120km라고 했던 언론도 있지만 이는 거짓이고, 130km 중후반 정도였기에 김재박 감독은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신인으로 스프링캠프에 포함된 김수경. 그러나 좀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 차려진 2차 캠프에서 반전을 넘어 반란(?)을 일으켰다. 일본 캠프에서 현대는 자매결연 팀 오릭스와 연습경기를 치렀다. 다만 당시 오릭스는 2군 선수들을 출전시킨 것이 아니라 베스트 멤버를 투입해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특히 오릭스 베스트 멤버와 경기에서 3-2로 앞서던 8회 무사 2, 3루 상황에서 등판했다. 그리고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확실하게 어필했다(당시 오릭스의 오기 감독도 김수경의 피칭이 매우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김수경은 일본 캠프에서 4경기 등판 8이닝 동안 단 1실점만을 했고, 30타자를 상대로 무려 14개의 삼진을 뽑아냈다.
반면 선발 로테이션 합류가 유력해 보였던 김홍집, 안병원 등 베테랑들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자 김수경은 ‘젊은 피’로 급부상했고, 그 결과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게 됐다.
김수경은 뽀얀(?) 피부과 앳된 얼굴에 안경을 낀 외모로 프로 투수보다는 그냥 순해 보이는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김수경의 최대 장점은 배짱이었다.
1998년 4월 23일 현대는 인천(도원)에서 펼쳐진 OB와 더블헤더 1차전에 선발로 김수경이 등판했다. 이날 김수경은 OB 외국인 타자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을 허용했다. 그러나 김수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냥 씩씩하게 정면 승부한 결과 프로 데뷔 첫 승을 달성했다. 시즌 시작할 때만 해도 패전처리 정도의 역할이 주어질 것 같았던 김수경. 그러나 150km에 가까운 빠른 볼과 2종류(?)의 슬라이더를 앞세우며 선발 투수로 자리를 굳혔다(당시 전문가들은 김수경의 슬라이더에 대해서 종과 횡으로 변하는 두 가지 구질을 보인다고 많이 설명했었다. 요즘으로는 달리 설명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 시절에는…).
전반기 14경기 5승 3패 1세이브 86.1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3.44를 기록했던 그는 후반기 18경기(선발 7경기) 무려 7승 1패를 기록했다. 그리고 1998년 9월 3일에는 스승 김시진 코치가 세웠던 한 시즌 신인 최다 탈삼진(154개) 기록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역사를 쓰기도 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선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김수경은 1998시즌 32경기(선발 20경기) 12승 4패 2세이브 160이닝 탈삼진 168개를 기록하며 신인왕과 승률왕 타이틀을 따냈다. 또한, 불안했던 외국인 투수 조 스트롱을 대신해 마무리를 맡은 한국시리즈에서는 2차전 세이브를 따내며 한국시리즈 최연소 세이브를 달성했다. 그리고 3승 2패로 앞선 마지막 6차전에 선발로 나와 승리 투수가 되면 팀 창단 첫 통합우승의 주역으로 한 시즌을 마감했다.
이듬해 현대 코칭스태프는 마무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명원-조규제 등을 놓고 고심하다가 미래 10년을 위한 계획으로 김수경을 선택했다. 참고로 1998년 한국시리즈에 마무리 역할을 맡긴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입단 두 번째 시즌은 선발이 아닌 마무리로 출발하게 됐다. 그러나 이는 오래 가지 못했다. 150km에 육박하는 빠른 볼과 강력한 슬라이더라면 충분할 것 같았다. 게다가 배짱도 있었기에 기대할 만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제구력이었다. 결국 계속 실패를 거듭하자 그의 보직은 마무리가 아닌 불펜으로 강등(?)됐다. 그러더니 결국 선발로 돌아왔다. 비록 힘겨운 출발을 했지만, 1999시즌 김수경은 40경기(27선발) 10승 11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4.14를 기록했다. 김수경은 2년 연속 10승은 물론 데뷔 첫 시즌(3위) 놓쳤던 탈삼진 타이틀 홀더(184개)가 됐다. 이제 김수경은 더는 무명의 투수가 아니었다. 그는 어엿한 현대 마운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 유니콘스의 미래로 우뚝 서다
1999시즌이 종료된 후 김수경은 등산하다가 발목 부상을 당하면서 불안한 출발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김시진 코치가 있었다. 입단 당시 전문가들의 평가로 골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투수를 3개월 만에 선발로 만든 인물이 김시진 코치였다. 2000년에도 둘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 다시 말해서 김시진 코치의 지도력과 김수경의 잠재력 + 성실성이 조화를 이루며 포텐이 터진 것이다.
2000시즌 김수경은 팀 선배 정민태-임선동과 함께 극강의 선발진을 구축했다. 전반기에만 19경기에 등판해 12승 5패를 기록했다. 더는 그에게 15승이 문제가 아니었다. 막강 타선 현대를 생각한다면 20승도 가능했던 페이스. 물론 20승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후반기 10경기 6승 3패를 기록했다. 2000시즌 최종 성적은 29경기 18승 8패 195이닝 평균자책점 3.74를 기록했다. 팀 선배 정민태-임선동과 함께 다승 부문 공동 1위에 오르며 타이틀 홀더가 됐다. 그러나 탈삼진 부문에서는 172개로(1위 임선동 174개) 아쉽게 2위에 머물며 2년 연속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포스트 시즌에서도 그는 플레이오프 1승, 한국시리즈에서 2승 1패를 기록하며 절정의 구위를 자랑하며 프로 통산 두 번째 우승을 경험하게 됐다.
『2000년 현대 선발 투수 3인의 다승 공동 1위를 두고 김재박 감독이 기록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비판을 넘어 비난하던 이들이 있었다. 아마도 최근에도 그런 발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00년 정민태-임선동-김수경은 정상적인 로테이션을 지키면서 선발 투수로 따낸 승리였다. 80년대처럼 갑자기 중간으로 1이닝 던지고 승을 챙긴 것도 아니다. 도대체 뭐가 치졸하다는 것인가? 심지어 정민태 코치의 증언에 따르면 시즌 막판에는 밀어주기가 아닌 똑같이 등판 기회를 줬다고 한다. 다만 임선동-김수경이 승리를 챙기지 못하고 정민태가 승을 따내면서 공동 1위가 된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의 연고지 문제로 팬이 적은 것이 분명 약점이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왜곡과 조작을 하는 사람들은…누군가라도 제발 바로 잡아 줬으면 좋겠지만, 현대가 없다는 것이…』
『2000년 7월 16일 수원 해태와 경기…
김수경은 9회초 2아웃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9회초 2아웃 1스트라이크에서 해태 외국인 타자 타바레스가 기습번트를 하며 내야안타를 만들며 대기록은 깨졌다. 퍼팩트나 노히트 노런이 이어질 때는 경기 후반 기습번트를 하지 않는 것 불문율이다. 불문율이 규정이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당시 해태 김응룡 감독은 타바레스에게 이러한 치졸한(?) 지시를 하면서 대기록을 날렸다.
문제는 김수경이 9회 2아웃에서 노히트 노런을 놓쳤다는 것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노히트 노런’이 깨진 역사를 말할 때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대진이 인천에서 현대를 상대로 10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할 때 11번째 타자에게 삼진을 잡을 수 없었던 이유로 김재박 감독이 번트 지시로 기록이 중단됐다고 한다.
하. 지. 만.
이것은 명백한 허위 사실이자 왜곡이다. 당시 김경기가 11번째 타자로 타석에 들어섰고 타격을 해서 유격수 땅볼로 아웃이 됐다. 필자는 라디오로 당시 경기를 듣고 있었다. 이것이 비인기 팀의 설움인가? 팬들은 그럴 수 있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기사’를 쓰거나 방송에서 언급해서 사실로 만드는 그런 사람들은 왜곡된 사실을 진짜 사실로 만든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대진 대기록을 치졸하게 깼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에 앞서 김응룡 감독이 한 짓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참고로 당시 수원 야구장에서는 김응룡 감독과 타바레스를 향해 현대 팬들의 욕설이 넘쳤다는 사실도…』
다이내믹한 투구폼과 150km의 빠른 볼에 변화무쌍한 슬라이더. 무엇보다도 고졸 3년차라는 나이는 최고의 무기였다. 엄밀히 말하면 2000년 정민태-임선동 중에 구위는 가장 훌륭했다. 특히 많은 이들이 김수경이 현대는 물론 KBO를 대표하는 투수로 10년 이상을 책임져 줄 것으로 기대했다. 심지어 200승 도전에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현대의 10년을 책임져 줄 것 같았던 그의 강력함은 2000시즌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이 슬픈 일이었다.
한순간의 선택 그리고…
2000시즌 종료 후 팀내 기둥이자 에이스 정민태가 일본으로 떠났다. 물론 임선동이 있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김수경이 팀의 중심으로 꼽히는 절대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좀 더 완벽한 투수가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투구폼 교정이었다.
사실 김수경은 킥킹을 할 때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동작은 독특하고 보는 이들에게 다이내믹한 느낌을 주지만 반동을 일으키는 만큼 무릎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구력을 향상을 위한 시도를 했지만, 이는 완벽한 실패가 되고 말았다.
갑자기 어정쩡한 투구폼과 하체 훈련을 전혀 하지 못한 것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2001시즌 김수경은 고작 20경기 등판해 6승 6패 97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점 5.20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이전에 알던 김수경은 완전히 사라졌다. 성적을 떠나 이전까지 시원하게 볼을 때리던 그의 모습은 사라졌고, 투구폼도 달라지면서 특유의 리듬이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투구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즉 깔끔하고 다이내믹하던 투구폼이 사라진 대신 킥킹과 테이크백 할 때 무언가 걸리는 것과 같은 동작이 발생했다. 쉽게 표현하면 덜컹거린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150km이 나오던 구속도 10km 정도 떨어졌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이런 모습은 계속됐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혹사를 지적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거나 야구를 안 보고 그냥 말하는 것이다. 혹사라고 할 것이 없었다. 훗날 김수경은 모든 책임을 본인에게로 돌렸다. 하지만 엄연히 말하면 김시진 코치의 지분이 상당했다. 김시진-김수경의 관계는 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김수경은 지도자 탓을 하지 않는 것. 이는 팬들의 시각에서 김성근에 의해 박살 난 투수들이 ‘혹사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물론 김시진 전감독을 까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대 팬들은 김시진 코치의 책임에 대해서 지적하는 이들도 많았던 것. 물론 결과론이지만 굳이 한 해 18승 한 투수에게 변화를 주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졌기에…김시진 코치나 김수경도 망가지려고 모험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팬의 입장에서는 너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다시 돌아온 김수경, 유니콘스 마지막 승리 투수
2002시즌 김수경은 27경기 등판해 12승 10패 151.1이닝과 평균자책점 4.88을 기록했다. 당연히 전년도 부진을 씻어냈지만, 기대치에 어울리는 성적은 아니었다. 반대로 마냥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 회복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3시즌 초반 그는 다시 2000시즌 김수경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번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명 좋은 빠른 볼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변화구나 체인지업을 고집하다가 어려운 경기 운영 혹은 경기를 망치는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경은 2003시즌 29경기에 등판 167이닝을 소화하며 10승 9패 평균자책점 4.63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현대. 그리고 김수경은 가을에 빛나는 투구를 했다. 아니 당장 가을무대보다 다음을 기대하게 했던 것이다. 한국시리즈 3차전 2실점 호투를 펼쳤고, 5차전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경기를 펼쳤다. 그리고 팀이 통산 세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데 매우 큰(?)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정민태가 따냈다. 따라서 누군가(?)의 1승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김수경이 해낸 것이다. 그러므로 김수경의 1승은 단순한 1승이 아니었다. 어쨌든 아쉬움은 있었지만, 김수경은 그렇게 다시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2연패에 도전하는 현대 유니콘스. 그리고 2004년 초반 김수경은 팀의 에이스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5월에 정민태-피어리가 무너졌을 때 김수경의 고군분투는 팀이 1위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였다. 다만 이때 김수경은 일주일에 한 번(금요일)만 등판했다. 그의 무릎이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반기만 보면 전성기 투구폼으로 거의 돌아왔고, 더는 도망가는 모습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릎이 말썽이었다. 전반기 15경기에서 7승 3패 평균자책점 3.35를 기록했던 김수경. 하지만 이후 10승에 도달하는 과정이 매우 험난했다. 특히 부상에서 돌아왔을 때는 투구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상체만으로 투구하면서 구속도 130km 중반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팀이 잘 나가고 있음에도 힘겹게 시즌을 보내던 김수경은 2004시즌 26경기에서 152.2이닝을 책임지며 11승 8패 평균자책점 4.01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참고로 팀은 2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김수경은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는 부진했다. 그러나 6차전에서는 진통제를 맞고 던지는 투혼을 발휘하며 그날 만큼은 언터처블이었다. 다만 타자들이 1점을 뽑아내지 못하며 무승부를 기록했다. 어쨌든 9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현대는 통산 네 번째 우승이자 마지막 우승을 달성했고, 김수경에게도 현역 마지막 우승이었다.
시즌이 끝나고 김수경은 무릎 수술을 했다. 그리고 맞이한 2005년 사실 던져준 것이 감사할 정도였다. 김수경은 2005시즌 90.2이닝을 소화하며 7승 7패 5.76의 평균자책점으로 시즌을 마감한다. 2006시즌도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17경기에서 평균자책점은 3.78을 기록했지만 4승 7패에 그쳤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이닝을 소화했던 시즌도 아니었다.
2006시즌이 끝나고 김수경은 FA를 선언하며 현대와 1+2년 계약에 합의했다. 그리고 2007시즌 김수경은 최근 몇 시즌 가운데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30경기에 등판하며 176.1이닝을 소화했다. 그리고 12승 7패 평균자책점 3.88을 기록한 것. 특히 당시 현대의 전력은 가장 좋지 않을 때였다. 김수경 개인적으로는 2000년 이후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한 시즌이었다. 여기에 개인 통산 100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냥 좋게만 이야기할 수 없었다. 슬프게도 김수경은 현대 유니콘스 역사의 마지막 선발 투수가 되었고, 마지막 승리 투수였기 때문이다. 모기업의 어려움 속에서 사실상 그냥 버텨온 현대. 하지만 결국에는 현대 유니콘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니콘스의 시간이 멈추면서 순백의 유니콘스의 시간도 멈췄다.
끝내 좌절된 통산 124승
김수경에게는 꿈이 있었다. 자신을 있게 해준 김시진 감독과 또한 가장 좋아하는 선배 정민태 코치의 통산 승수(124승)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현대는 사라졌지만 우리 히어로즈의 첫 시즌을 보낼 때 김수경은 고작 29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히어로즈에서 5년 동안 그가 추가한 승리는 단 10승에 불과했다. 그렇게 그의 꿈이자 목표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수경은 2010년 이후에는 1군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 2012년을 끝으로 마운드를 떠나 불펜 코치로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도 재기를 꿈꾸기도 했던 김수경. 그렇기에 공식적인 은퇴 선언도 없었다. 하지만 1군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2013년 시즌이 끝나고 고양 원더스에 선수로 입단하며 재도전을 꿈을 꿨다. 하지만 결국 프로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5년 10월 26일 정식으로 은퇴했다. 이후 NC 스카우트로 활동하던 김수경은 2018년부터 NC의 코치로 지도자로 활동 중이다.
숨겨진 아픈 손가락 순백의 유니콘
이제 김수경이 현대 유니폼을 입을 수는 없다. 그러나 김수경을 추억하면 필자는 아픈 손가락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흔히 말하는 아픈 손가락과는 의미가 좀 다르다. 선배는 물론 후배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선수다. 현대에서 말년에 김수경은 이보근에게 자신을 말하면서 “과거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아팠다.
2000년까지 김수경이라면 KBO 통산 200승이 아니라 그 이상도 가능했다. 꼭 200승이 아니라도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더 높이 가려다가 날개가 꺾였고, 그의 무릎은 그를 발목 잡기도 했다. 그래서 아픈 손가락이었다. 다른 것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무릎만 건강하게 버텨줬다면…이제는 부질없는 가정이지만…그래도 그는 KBO리그가 없어지는 그날까지 혹은 야구라는 것 자체를 기억 못할 때까지 유니콘스의 마지막 승리 투수다. 그리고 선배 정민태도 하지 못한 유니콘스의 마지막 선발 투수였다.
그가 어떤 지도자가 될지는 모르겠다. 어느 단계까지 올라갈지도 그러나 언젠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선수 시절 못다 이룬 꿈을 지도자로 이루길 바라고 응원한다.
● 김수경
● 백넘버 : 30
● 1979년 8월 20일생
● 인천서화초-대헌중-인천고
● 우완투수
● 1998년 고졸우선지명 (현대)
● 소속팀 : 1998-2007 현대 -> 2008-2012 히어로즈
● 주요 경력
- 신인왕(1998)
- 승률왕(1998)
- 탈삼진왕(1999)
- 다승왕(2000)
- 한국시리즈 우승 4회(1998, 2000, 200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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