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대망의 한국시리즈 1차전…
태평양 선발 김홍집과 LG 선발 이상훈의 숨 막히는 투수전으로 잠실벌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7회까지 양 팀은 1-1로 팽팽히 맞섰다. 시즌 상대전적 5승 13패의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던 그 태평양이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태평양에게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8회초 1사 1,3루…
LG 마운드는 차동철이 지키고 있었고, 타석에는 4번 타자 김경기가 들어섰다. 플레이오프 3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한 김경기. 그는 팀 내 최고의 타자답게 첫 포스트시즌에서도 돌고래 군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미 앞서 이상훈에게도 안타를 뽑아냈다. 그래서였을까? LG 배터리는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고의4구로 만루를 채웠다. 그리고 LG 벤치가 움직였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특급 소방수 김용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그래도 만루니까…’
소위 말해서 그 옛날 감성(?)으로 ‘외야 후라이(플라이)’ 하나면 태평양은 경기를 뒤집을 수 있었다. 김홍집의 구위라면 사상 첫 한국시리즈 승리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은 현재 타석에 태평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윤덕규-김경기 그리고 그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볼카운트는 2-3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딱”
김용수의 손을 떠난 볼이 배트에 맞았다. 그리고 캐스터의 음성이 이어진다. “2루에서 포스아웃! 다시 1루에서…아~우웃! 태평양! 최악의 상황이 연출됩니다.”라고 이어지는 캐스터의 멘트까지…
너무도 야속했다.
선동열 앞에서도 당당했던 남자, 약체팀 안방을 굳건하게 지켰던 돌고래의 영웅이 중요한 순간에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영웅 김동기의 야구는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비록 현대 유니폼을 오래 입지는 못했지만, 만년 약체팀의 강타자이자 우직했던 포수 그리고 한때는 한없이 원망스러웠던 사나이 ‘백돼지’ 김동기를 추억해보고자 한다.
인천 연고의 새로운 대형 포수의 탄생
인천고-인하대를 졸업한 김동기는 1986년 전설의(?) 청보 핀토스 유니폼을 입게 됐다. 당시 팀에는 삼미 시절부터 팀의 중심이자 안방 터줏대감으로 김진우가 버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인 김동기는 108경기 체제에서 무려 87경기를 뛰며 타율은 0.248에 그쳤다. 하지만 홈런은 무려 10개나 기록했다.
『참고로 1986년 홈런왕이 해태 김봉연인데 21개를 기록했다. 따라서 홈런 10개라는 것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즉 21세기 야구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데뷔 두 번째 시즌이던 1987년부터 김동기는 팀의 주전 포수로 도약했다. 그동안 안방을 지키던 베테랑 김진우가 부상과 강태정 감독과 불화로 전력에서 제외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주전이 된 김동기는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다. 1987시즌 105경기에 출장하며 타율 0.277 홈런 9개 48타점을 기록했다. 특히 그의 타율은 이만수-유승안에 이어 포수로서는 리그에서 세 번째 고타율이었다. 어쨌든 내세울 수 있는 타자가 없던 청보에도 강타자(?)가 탄생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름만 프로였다. 그리고 주전 자리도 경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거의 짬밥 순…그래서 후배한테 자리를 물려준다는 개념이 있었다. 이러한 전통이나 한국만의 문화는 1990년대에도 고참 선수들에 의해 표현되기도 했다.』
1988년 인천 연고 팀은 세 번째 주인을 만나게 된다. 1985년 후반기 삼미를 인수해 야구판에 뛰어들었던 청보가 1987년을 끝으로 신속하게(?) 간판을 내리고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출범을 알린 ‘태평양 돌핀스’ 하지만 창단 첫해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하며 처음부터 시작했고, 전신팀과 마찬가지로 동네북 신세가 됐다.
하지만 김동기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는 전반기 무려 0.379의 고타율로 마감하며 리그 타격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어쩌면 인천 연고 사상 첫 리딩 히터가 탄생할 수도 있던 시즌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부상은 김동기의 순항을 막았다. 이는 어쩌면 그의 프로 생활도 기구했던 인천 야구의 역사와 함께한 것이 아니었는지…
결국, 김동기는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최종 성적은 212타수 76안타 타율 0.358 홈런 10개 39타점.
물론 풀타임으로 뛰었다면 장담할 수는 없었겠지만, 당시 리그 타율 1위가 0.354의 김상훈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고두고 아쉬울 수밖에…그래도 만년 하위 팀에 이런 타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천 팬들은 행복했다.
1989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의 영웅
태평양은 1989년 KBO리그에 큰 반란(?)을 일으켰다.
정명원-박정현-최창호라는 강력한 ‘트로이카’를 앞세워 인천 연고 팀으로는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게 됐다(물론 리그 제도가 바뀐 것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어쨌든 태평양은 3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4위 삼성과 KBO리그 역사상 첫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됐다.
쌀쌀한 날씨에 벌어졌던 1차전…
양 팀 투수들의 팽팽한 투수전속에서 경기는 어느덧 연장 14회 말이 되었다. 2사 1, 3루의 상황. 만약 태평양이 점수를 내지 못한다면 경기는 시간제한에 걸려 그대로 끝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김동기는 당시를 회상하며. “아마도 인천 팬들이 내가 김성길(당시 삼성 투수)에게 약했던 것을 알았나 보다. 내가 타석에 들어서자 인천 팬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김동기는 이날 직전 타석까지 5타석 4타수 무안타로 부진했다. 게다가 상대 김성길과의 시즌 기록은 21타수 2안타 타율은 무려(?) 0.095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시즌 기록이었다. 김동기는 바깥쪽으로 흐르는 커브를 받아쳤다.
“딱”
파열음과 함께 타구는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이 타구는 철망을 넘겨 버리는 비거리 120m짜리의 ‘굿바이 3점 홈런’이 되었다. 한동안 고요했던 도원 구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김동기의 이 한 방은 인천 연고 팀의 포스트시즌 첫 승으로 영원히 남게 됐다.
물론 계속된 준플레이오프 2차전과 3차전에서 김동기는 침묵했다. 또한 팀은 삼성을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해태를 만났다. 하지만 김동기는 물론 태평양은 힘도 제대로 못 쓰고 3전 전패를 당하며 3위로 1989년 야구를 마감했다.
김동기는 1989시즌 120경기를 모두 뛰며 타율 0.251 홈런 11개 59타점을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프로 생활 11년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00안타를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포수로 시즌 전경기를 소화한 시즌이었다. 만약 현대 야구에서 포수가 전경기를 뛴다면 그 팀 감독은 팬들에게 가루가 될지도 모른다. 반대로 요즘처럼 관리받았다면…어쨌든 1980년대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태평양과 팬들 김동기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즌이었다.
든든한 안방마님, 그리고 혹사
나 홀로 외롭게 돌고래 군단의 타선을 이끌어 가던 김동기에게도 최고의 파트너가 생겼다. 1990년 인천 연고 역사상 최고 계약금을 받은 대형 신인 ‘김경기’가 입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천 팬들에게 ‘영원히’ 남을 전설의 K-K포가 탄생한다.
『물론 다른 팀 팬들은 감흥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이 두 선수가 리그를 씹어먹을 만한 활약을 한 것도 아니고, 팀도 만년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 팬들에게는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존재가 탄생한 것이었다.』
팀은 다시 추락했다. 그러나 김동기만은 견고하게 안방을 지켰다. 그는 1990시즌 114경기를 뛰며 타율 0.250 홈런 14개 46타점을 기록했다. 참고로 팀은 4위를 넘보지 못할 정도의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하지만 태평양 팬들은 김경기-김동기를 보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참고로 김경기는 입단 첫해 120경기 타율 0.285 홈런 10개 68타점을 기록했다).
이듬해 김동기는 시즌 초반 발목 부상과 허리부상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결국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성적은 98경기 출장해 타율 0.262 홈런 7개 34타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동기는 타자로 98경기를 뛴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포수였다. 126경기 체제에서 98경기를 뛴 포수. 이는 명백한 혹사였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 시절의 일은 현재의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시절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던 시대였다. 안타깝지만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해 누군가를 맹비난할 수는 없다. 팬심으로는 욕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영웅 김동기는 다시 한번 멋지게 일어났다. 팀은 여전히 바닥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1992시즌 김동기는 107경기 출장해 타율 0.294로 커리어 두 번째로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게다가 한 시즌 개인 최다 홈런인 15개와 58타점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다만 팀이 바닥에 머물러 있어서 주목받지 못할 뿐이었다.
『세이버 스탯으로 따지면 1988시즌이 최고의 한해로 구분되겠지만…앞서도 말했지만 그 시절에는 그랬다고 하지만 100-120경기 체제에서 꾸준히 90-100경기를 뛴 포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부상으로 62경기밖에 뛰지 못한 1988년을 제외하면 김동기는 거의 매년 100경기에 가까운 혹은 그 이상을 뛰었다. 이는 분명한 혹사다. 그 시절에는 더블헤더도 있었다.
요즘 팬들 가운데 과거 선수들을 현대 선수들과 비교하면서 깎아내리기도 한다. 그런데 반대로 요즘 선수들이 80-90년대처럼 뛴다면 버틸 수 있는 인물들은 그리 맞지도 않다는 사실…』
1993년 팀은 압도적인 꼴찌로 추락했고 김동기도 팀의 운명과 함께 했다. 고작 93경기에 출장하면서 타율 0.244 홈런 3개 34타점을 기록한 것이다. 문제는 최악의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김동기는 93경기나 뛰었다. 참고로 3개의 홈런 중에 1개가 만루홈런이었다. 그런데 이 만루홈런은 무려(?) 선동열을 상대로 친 것이었다.
마지막 불꽃, 그리고 은퇴
1989년 태평양이 그랬던 것처럼 1994년 태평양도 그랬다. 아니 그때보다 더 강력한 돌풍을 일으켰다. 선발 5명 중 4명이 10승 이상을 올렸고, 돌아온 정명원이 40세이브로 리그 신기록을 세웠다. 여기에 유일한 득점 루트 Y-K-K포가 굳건하게 버티며 인천 연고 최초로 리그 2위 및 플레이오프 직행의 쾌거를 이뤄냈다.
Y-K-K포의 한 축이었던 김동기는 119경기를 뛰면서 타율 0.264(97안타) 15홈런 50타점을 기록하며 5번 타자로 맹활약했다. 물론 한국시리즈 1차전 병살타가 두고두고 한스럽지만, 그는 후배 김경기와 함께 돌고래 타선을 이끌며 프로 통산 첫 올스타전 BEST 10에도 뽑혔다. 어쨌든 준우승으로 생애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다만 준우승의 아쉬움처럼 골든글러브 투표에서도 단 2표 차로 2위가 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는 김동기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다시 태평양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김동기의 존재감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1995시즌에는 단 66경기를 뛰면서 타율 0.173 홈런 9개 28타점을 기록. 이제 김동기와 이별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태평양이 현대에 매각되면서 1995시즌을 끝으로 돌고래의 유니폼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과 함께 김동기는 K-K 부활을 위해 구슬 땀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이전과 달리 매우 축소됐다. 시즌 초반, 중요한 상황에서 대타로 나와 한방을 해주는 역할을 하더니 부상과 그로 인해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그의 이름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 결과 단 48경기에 출장 타율 0.218 홈런 5개 13타점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남겼다. 이미 시즌 중에 전력 외로 분류되면서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김동기의 현역 생활은 씁쓸하게 끝났다.
기억 속의 김동기
1992년의 어느 날…
태평양은 인천에서 LG와 경기를 하고 있었다. 마운드에는 괴상한(?) 투구폼의 최창호가 있었다. 그리고 홈 플레이트 쪽에는 초록색 유니폼에 마스크를 쓴 이가 있었다. 보라색 미트를 낀 그는 외형적인 모습만 봐도 그냥(?) 포수였다. 늘 외롭게 분투했다. 그러나 주목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태평양 팬들에게는 영웅이었다. 그리고 김경기와 함께 나약한 돌고래 군단을 이끌던 대장이었다.
나 홀로 꼴찌 독주(?)를 하던 1993년…모든 타자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질 때, 김동기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물론 그도 부진한 시즌이었지만 적어도 선동열 앞에서는 그랬다는 것이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지만 해태와 태평양의 경기가 있던 날. 스포츠 뉴스에서는 태평양이 0-4로 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마운드에는 선동열이 올라왔다는 소식도 전했다. 당연히 지는 경기…
그러나 스포츠 뉴스가 끝날 무렵 속보(?) 아닌 속보로 전한 소식은 경기가 4-4가 됐다는 것이다. 선동열이 갑자기 강판당했을까? 아니다. 선동열을 상대로 홈런, 그것도 무려 만루홈런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소식의 주인공이 바로 김동기였다.내친김에 경기도 이겨 해태와 선동열을 무찔러(?) 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태평양은 4-5로 졌다. 그래도 선동열에게 만루 홈런을 쳤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기도…
훗날 선동열은 자서전에서 밝혔지만, 김동기에게 하루에 3안타를 맞은 경기가 두 번이나 됐다고 한다. 또한, 김동기는 정규시즌에서 선동열로부터 2홈런을 기록한 몇 안 되는 선수였다. 그 정도로 선동열에게 강했던 사나이가 바로 김동기였다.
과거 선수들에게서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 옛날(?) 야구는 선수들이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하지 않았다. 물론 코칭스태프도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김동기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유명할 정도로 술고래(?)였다. 그런데도 포수로 무려 11년이나 뛰었다는 것은 그의 야구 재능과 체력은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지도자로 활약했던 그는 건설업에 종사한다는 소식도 전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지난 7월 올스타전에서 한때 함께 뛰었던 김경기 그리고 정민태와 함께 시구/시포자로 나섰다. 어쨌든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기대한다.
● 김동기
● 1964년 3월 5일생
● 인천신흥초-동인천중-인천고-인하대
● 우투우타 / 포수
● 1986년 신인 드래프트 1차 지명(청보)
● 주요 경력 : 1986-1987 청보 -> 1988-1995 태평양 -> 1996 현대
'현대왕조 > 왕조의 주역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설의 리드오프 ‘안타치고 도루하는’ 전준호 (41) | 2024.11.09 |
---|---|
‘현대 왕조의 마지막 승리 투수’ 김수경 (11) | 2024.10.13 |
국민 유격수 ‘만두’ 박진만 (28) | 2024.10.10 |
현대 왕조의 끝판왕 ‘조라이더’ 조용준 (11) | 2024.10.01 |
왕조를 지킨 ‘영원한 캡틴’ 이숭용 (2) | 2024.07.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