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날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구단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날까지 현대는 1번 타자 문제로 고통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현대에는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KBO 역사상 손꼽히는 1번 타자, 그리고 현대에 맞춤형 1번 타자였던 전준호를 추억해본다.
충격적인 전준호의 현대 입성기
1997시즌 개막 4일 전…프로야구계에는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이는 롯데의 1번 타자 전준호가 현대 유니폼을 입게 된다는 것이었다. 과거(1995년)에도 전준호와 김홍집(안병원)을 카드로 협상이 진행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성사될 줄 몰랐다. 당시만 해도 트레이드는 선수가 팀에 버림받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구단들도 중심 선수가 낀 대형 트레이드는 보복성으로 진행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전준호의 현대 이적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현대가 롯데에 내주는 카드는 없었다. 현대는 전준호를 영입하는 대신에 명목상 현금 5억 3천과 문동환을 내줬다. 참고로 문동환은 롯데 선수였어야 했다. 다만 그가 실업팀 현대 피닉스에 입단했기 때문에 롯데가 문동환을 얻으려면 위약금을 내야 했다. 하지만 롯데는 그 돈을 주면서 문동환을 데리고 올 팀이 아니었다. 그 결과 위약금을 지불하기 싫어서 전준호를 사실 현금 5억 3천에 팔아넘긴 것이다.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현대에 대해 많은 비난이 있었다. 현대가 무조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현대를 악의 축으로 비난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도 있다. 현대 피닉스에 입단한 선수들이 마치 프로에 가고 싶었지만, 현대 피닉스가 막아선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현대가 돈을 뿌려서 망쳐놨다면 기존 구단들 역시 치졸한 짓을 했다. 당시 1차 지명을 했다는 이유로 해당 선수들에 대해 대우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제대로 된 협상도 안 한 선수도 있었다. 문동환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래 놓고 마치 선수가 배신한 것처럼 언론 플레이를 했다. 그에 앞서 현대의 KBO 입성에 대해 절대적인 반대를 했다. 왜냐하면 대기업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NC가 제 9구단으로 들어올 때, 대기업이 아니라고 기존 몇몇 구단이 완강히 반대했다.
아무튼 롯데는 전준호를 버렸다. 이후 김대익을 시작으로 브래디 등 여러 인물로 돌려막기를 하다가 FA 정수근과 6년 계약을 했다. 하지만 그 6년은 돈만 날렸고, 10년 넘게 1번 타자가 없어서 고통받았던 것. 반면 현대는 리그 최고의 1번 타자와 함께하면서 두 팀의 운명이 바뀌었다.』
어쨌든 전준호는 갑작스럽게 현대 유니폼을 입었다. 그에게는 너무도 충격이었던 것일까? 시즌 개막전 무안타에 그치는 그는 개막 2차전에서도 무안타 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던 8회말 싹쓸이 3루타로 시즌 첫 안타와 결승 타점을 올리며 화려한 신고식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1997년 전준호가 보여준 가장 강렬했던 모습이었고, 어쩌면 전부였다고 할 수 있었다. 팀도 곤두박질쳤지만, 전준호 역시 시즌 내내 부상 그리고 부진으로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현대 일원이 된 첫해 전준호는 110경기를 뛰며 91안타 43타점 도루 23개와 타율 0.247을 남기며 프로 입단 후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유니콘스 군단 공격의 시작을 열다
비록 이적 첫해 최악의 한 해를 보냈지만, 이듬해 완벽하게 부활했다. 전준호는 1998시즌 리그를 압도한 팀의 1번 타자답게 126경기를 모두 뛰며 143안타 도루 35개 타율 0.321을 기록하며 입단 후 최고의 타율과 가장 많은 안타를 기록했다. 게다가 프로 통산 두 번째 우승과 세 번째 골든 글러브까지 수상하며 우리가 알던 전준호로 돌아왔다. 1999년에도 전준호는 129경기를 책임지며 137안타 도루 38개 그리고 3할에 실패했지만 0.291의 타율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쳤다.
어쨌든 더는 현대에서 1번 타자로 고민할 이유가 사라졌다. 게다가 건강한 전준호는 거의 전경기를 소화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새천년 그는 프로 데뷔 후 두 번째로(은퇴 시점 제외) 적은 경기를 뛰었다. 이유는 있었다. 당시 현대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설전이 오가는 일이었다. 선수협 문제로 팀 동료와 불화에 따른 것이 이유였다. 이 때문에 전준호의 시즌 시작이 늦어졌다. 하지만 전준호가 돌아왔을 때 현대 라인업은 사실상 약점이 없었다. 게다가 ‘전준호의 출루 = 득점’이라는 공식이 성립됐었다. 2000시즌 전준호는 87경기만 뛰었지만, 타율 0.316과 도루 18개를 기록하면서 팀 창단 두 번째 우승이자 새천년 첫 우승팀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선수협 문제에 대해 당시 구단 편에 선 선수들과 선수협과 갈등도 상당했다. 지금도 그 일은 누군가에게 비난의 꼬리표가 된다. 하지만 당시 선수협도 무조건 옹호할 수 없었다.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은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했든 뭐든 야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훗날 물의를 일으켜 이미지가 너무 좋지 않지만 강병규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데도 선수협은 그라운드에서 퇴출된 이들은 사실 그 어떤 것으로도 책임져주지 않았다.
분명 그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야구판은 달라졌다. 하지만 100% 옳은 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자신들과 뜻을 함께 하지 않았다고 배신자 혹은 구단의 앞잡이로 몰아가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도 2군 선수들의 처우 개선이 우선이었을까? 결과적으로는 그때도 그랬고, 이후에도 선수협이 그 역할을 별로 해내지 못했다. 물론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건강을 되찾은(?) 전준호는 2001시즌 125경기를 뛰면서 130안타 4홈런 27도루 타율 0.325를 기록하며 타율에 있어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생애 첫 FA를 선언한 전준호는 현대와 3년 총액 12억(계약금 4억, 연봉 2억, 옵션 2억)에 계약했다. FA 제도 이후 먹튀들이 판치던 세상(?)에서 현대는 걱정이 없었다. FA 계약 첫 시즌 전준호는 126경기를 소화하며 126안타 도루 26개 타율 0.300을 기록하며 현대의 부동의 1번 타자로 자리를 지켰다.
이별 준비와 우승, 그리고 긴 이별…
2003년 현대는 통산 세 번째 정규리그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전준호 역시 시리즈에서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팀의 통산 세 번째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2003시즌 129경기를 뛰면서 119안타 도루 20개를 기록하며 타율은 고작 0.269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출루율이 0.365에 불과한 것. 이는 현대 유니폼을 입은 첫해를 제외하고 가장 좋지 않은 수치였다. 참고로 전준호는 1998년 이후 출루율이 해마다 3할 후반에서 4할 이상을 찍었다. 사실 전준호의 가치는 도루 능력이 아니라 언제든 출루를 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런 그에게 장점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현대도 새로운 1번 타자를 생각할 때가 온 것이었다. 전준호의 나이가 30대 중반을 향하고 있었고, 그의 심각한 ‘소녀 어깨’는 사실상 수비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전준호는 2004년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 같았다. 132경기를 뛰면서 142안타와 무려 53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이 부문 2위(44개) 김주찬을 여유 있게 따돌리고 무려 35살의 나이에 도루왕을 차지했다. 그리고 전준호는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KBO리그 역사상 1호 한국시리즈 홈스틸을 기록한 것이다. 어쨌든 사력을 다해서 뛰었던 전준호는 현대의 통산 네 번째 그리고 마지막 우승에 중심에 서 있었다.
『당시 전준호가 미친 듯이 뛸 때마다 현대 팬들은 “안 뛰어도 된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전준호의 체력을 위해서였다. 물론 그가 한 베이스, 한 베이스를 훔칠 때마다 팬들은 희열을 느끼기도…참고로 전준호는 95년 69개의 도루를 끝으로 2003년까지 단 한 차례도 40개 이상 도루를 했던 적이 없었다. 뭐 현대라는 팀이 그럴 필요도 없긴 했지만 말이다. 전준호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진짜 대도’의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것은 마지막 불꽃이었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해태밖에 하지 못했던 2년 연속 통합 우승을 달성한 현대. 그러나 모기업의 지원이 사실상 없는 상황에서 주력 선수들이 대거 이탈했다. 그리고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으로 팀은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전준호 역시 94경 74안타 도루 18개를 기록하며 0.266의 타율로 시즌을 마감했다. 아마도 2005시즌은 은퇴 시즌을 제외하면 프로 입단 후 최악의 시즌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109경기 타율 0.287 도루 20개를 기록하며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일조했지만 그렇게 현대와 길었던 인연이 끝나가고 있었다. 한편 이해 8월 5일 KBO리그 1호 통산 500도루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7시즌 전준호는 38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21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3할에 가까운 0.297의 타율을 기록했다. 특히 최근 2시즌 동안 100안타를 넘기지 못하던 그는 110안타를 기록한 것. 다만 도루는 11개로 프로 입단 후 주전으로 뛰면서 가장 적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2007년을 끝으로 현대 유니콘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전준호는 히어로즈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갔다. 2008년 109안타와 0.310의 타율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게다가 KBO리그 두 번째로 2천 안타 달성과 2천5백 루타(10번째), 18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 통산 2천 경기 출장, 3루타 100개 등 많은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세월을 거스를 수 없었다. 시즌 초반 당한 부상으로 2009년에는 고작 21경기를 뛰며 타율 0.242와 단 2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완벽했던 1번 타자 전준호
“안타 치고 도루하는 전준호~안타 치고 도루하는 전준호~”
팀은 사라졌다. 그리고 전준호가 그라운드를 떠난 지 십수 년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응원가가 생각난다.
롯데 시절 이종범과 도루 대결할 때는 진짜 무서운 스피드를 자랑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그런 기억이 사실 없다. 하지만 그는 현대에서 KBO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1번 타자였다고 말하고 싶다.
현대 시절 그의 도루 숫자는 많이 줄었다. 은근히 실패도 많았다. 하지만 전준호가 루상에 나가면 상대는 골치가 아팠다. 그보다 타석에서도 전준호는 만만한 타자가 아니었다. 30대 중반 이후에는 배트를 짧게 잡고 유격수와 좌익수 사이에 떨어지는 안타를 친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능력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요즘처럼 극단적인 시프트를 한다면 기습번트나 또 다른 방향으로도 충분히 안타를 만들었을 타자. 바깥쪽의 볼을 마치 점프하면서 커트해내는 그의 능력은 탁월하다는 말 밖에는…
게다가 투수와 1루수 - 2루수 사이로 흘러가는 기습번트는 현시대에 뛰는 선수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그의 전매특허였다. 여전히 수원 1루 관중석 맨 꼭대기에서 그의 번트 타구 방향과 궤적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다. 아마도 지금 이런 번트를 댈 수 있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현대가 존재했다면…그는 화려한 은퇴식과 함께 팬들에게 박수받고 그라운드를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는 사라졌다. KBO리그 통산 최다 도루 기록을 보유한 전설적인 인물임에도 은퇴식도 없이 퇴장해야 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현대 유니콘스가 사라진 지도 십수 년이 지났다. 이제 현대 소속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필자의 마음속에는 또 한 명의 현대 유니콘스 영구 결번 선수다.
전준호는 지도자 생활하다가 현재는 해설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분명 쉽지는 않겠지만, 현역 시절 그라운드를 누볐던 것처럼 감독으로 도루왕이 되기를 응원한다.
● 전준호
● 백넘버 : 1
● 1969년 2월 15일생
● 마산상남초-마산동중-마산고-영남대
● 좌투/좌타/외야수
● 1991년 2차 2라운드(롯데 지명)
● 소속팀 : 1991-1996 롯데 -> 1997-2007 현대 -> 2008-2009 우리
● 주요 경력
- 도루왕 3회(1993, 1995, 2004)
- 골든 글러브 3회(1993, 1995, 1998)
- 득점왕 1회(1995)
- 한국시리즈 우승 5회(1992, 1998, 2000, 2003, 2004)
- KBO 통산 도루 1위(549개)
- KBO 최초 2천 경기 출전(2008년 6월 7일 한화전)
- KBO 2호 2천 안타(2008년 9월 11일 롯데전)
- KBO 최초 2천 경기 출전 및 2천 안타 달성
- KBO 최초 3루타 100개 달성(2008년 10월 3일 두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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