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외국인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내야수 에드가 캐세레스를 선택한 OB는 2라운드에서 거포형 타자 ‘타이론 우즈’를 선택했다. 우즈는 현대 쿨바, 삼성 베이커와 함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인물로 큰 어려움 없이 계약에 성공했다(사이닝보너서 2만 달러 포함 총액 9만 4천 달러).
OB의 일원이 된 우즈는 커리어도 주목할 것이 없는 수준의 선수였다. 1996년 더블A에서 타율 0.312 홈런 25개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97년 트리플A에서 타율 0.352 홈런 9개를 기록했다. 당시 KBO리그 수준을 고려해도 눈에 띄는 수준의 커리어는 분명 아니었다.
어쨌든 시즌 초반 우즈는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무조건 힘으로 대응하는 모습으로 일관하면서 활약보다 민폐와 같은 존재로 한때는 퇴출설리 돌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적응해나가면서 전반기 65경기를 뛰며 타율 0.295 홈런 18개 46타점을 기록하며 현대 쿨바와 함께 성공한 외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물론 전반기만 보면 리그를 압도하는 그리고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그런 수준의 우즈는 아니었다. 쿨바가 리그 최고 타자였다는…
그러나 후반기 우즈는 완전히 다른 타자가 됐다.
후반기 무서운 페이스를 자랑하던 우즈는 9월 6일 시즌 34호 홈런을 기록하며 선두 이승엽을 3개 차로 추격했다. 그런데 더 무서웠던 것은 기세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급기야 13일 시즌 37호 홈런을 기록하며 침묵하던 이승엽과 공동 선두에 이름을 올렸다. 지금까지 우즈는 추격자였다. 하지만 9월 13일을 기점으로 그는 도망자(?)가 됐다.
9월 24일 장종훈에 이어 KBO리그 역대 두 번째 40홈런 타자로 새로운 역사를 썼고 다음 날에는 41호 홈런으로 장종훈의 한 시즌 최다홈런 타이를 이뤘다. 그리고 10월 1일은 KBO리그에 있어서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현대와 잠실 홈경기에서 우즈는 현대 선발 정민태를 상대로 시즌 42호 홈런을 기록. 한국프로야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우즈의 홈런 페이스는 실로 대단했다. 4월 4개, 5월 6개, 6-8월 각각 7개. 9월에는 무려 10개를 기록하며 극적인 역전 홈런왕과 한국 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외국인 선수가 됐다. 1998시즌 우즈 126경기 전경기 출장, 타율 0.305 홈런 42개 103타점 출루율 0.393 장타율 0.612 OPS 1.012를 기록하며 코리안드림을 이뤘다. 우즈는 홈런과 타점왕에 올랐고, 무엇보다도 KBO 역사상 한 시즌 최다 홈런의 새로운 주인공이 됐다. 그럼에도 ‘골든 글러브’의 주인공은 우즈가 아니었다(우리나라의 외국인 차별은 다른 리그에서 우리 선수들을 대하는 것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았다).
어쨌든 최고의 한 시즌을 보낸 우즈. 베어스에 남아주길 기대했지만 이길 수 없는 복병이 나타났다. 일본 야쿠르트에서 그를 영입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머니 게임’으로 이길 수 없는 OB는 인정에 호소하는 작전(?)을 펼쳤다. 우즈 역시 일본에서 성공할 자신이 없다는 뜻밖에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게다가 현대 쿨바의 재계약이 불발된 것에 충격을 받은 그는 공식적으로 22만 달러에 재계약을 하며 KBO리그 잔류를 선택했다.
그렇게 어렵게 다시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우즈는 두 번째 시즌 124경기 출장 타율 0.297 홈런 34개 101타점을 기록했다. 롯데 호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겼고, 첫해보다 기록이 약간 떨어졌다. 그러나 우즈는 여전히 우-동-수 트리오의 한 축으로 위용을 과시했다.
2000년에도 우즈는 베어스와 함께 했다. 다만 직전 시즌 22만 달러의 연봉에서 2만 달러 삭감된 20만 달러에 재계약을 한 것. 어쨌든 우즈는 두산과 계약하면서 최초로 3년 연속 재계약에 성공한 외국인 선수가 됐다.
한국에서 세 번째 시즌 초반, 현대 퀸란의 무서운 홈런 페이스에 우즈의 존재가 흐려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즈는 6월 22일 시즌 21호 홈런으로 이 부문 공동 선두에 이름을 올렸다. 우즈는 전반기 24홈런 78타점 타율 0.321과 OPS 1.021을 기록했고 후반기에도 15홈런 33타점 타율 0.303 OPS 1.017을 기록했다.
2000시즌 우즈의 최종 성적은 127경기 타율 0.315 홈런 39개 111타점 출루율 0.414 장타율 0.605 OPS 1.019를 기록했다. 어떤 면에서 2000시즌은 우즈의 기량이 정점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던 시즌이었다. 앞선 두 시즌과 다르게 바깥쪽 코스 대처 능력이 매우 좋아졌고, 홈런 방향 역시 골고루 분포되기도 했었다. 또한 우즈는 KBO리그 역사상 최초로 3년 만에 100홈런을 달성한 인물이 됐다. 하지만 다만 박경완에게 1개 차이로 밀려 홈런왕 타이틀 탈환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우즈는 6경기 동안 4안타 2타점 타율 0.190으로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팀은 심정수의 극적인 홈런 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우즈의 방망이는 살아나지 않았다. 7경기 동안 3안타에 그친 것. 다만 3안타가 모두 홈런이었던 것. 그의 타율은 0.136…두산은 현대와 한국시리즈에서 3연패 후 3연승으로 시리즈를 파이널로 이끌었지만, 우승에는 실패했다.
다시 한번 우즈는 베어스와 함께 할 것 같았다. 그런데 2001년 재계약은 난항을 겪었다. 이유는 2000시즌 우즈가 종종 느슨한 플레이를 할 때마다 팀에서는 “미국으로 보내겠다.”라고 퇴출 협박(?)을 했다. 그래서 우즈는 재계약 조건으로 ‘풀 개런티’를 요구한 것이다. 어쨌든 늦었지만 사이닝 보너스 6만 달러, 연봉 15만 달러 등 총액 21만 달러라는 믿을 수 없는 금액에 계약했다.
그리고 우즈는 트로이 닐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면서 잠시나마 성실한 우즈로 변신했다. 김인식 감독도 그에게 독설을 날리면서 “닐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막상 시즌이 시작되자 우즈는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다. 반면 닐은…
2001시즌 초반 우즈는 손등 부상으로 똑딱이 타자로 변신했다. 그리고 4월 타율 0.325 홈런 4개 18타점을 기록했던 것. 참고로 5월에는 0.277의 타율에도 4개 홈런을 기록했다. 하지만 부상이 회복된 우즈는 6월 홈런 10개를 몰아치며 ‘원년 용병’의 자존심(?)을 지켰다. 전반기 홈런 20개 61타점 타율 0.285를 기록한 우즈는 올스타전에서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후반기에도 우즈는 변함없는 활약을 펼친 우즈는 2001시즌 118경기 출장 타율 0.291 홈런 34개 113타점을 올리며 홈런은 3위에 올랐으나, 타점왕에 올랐다. 참고로 우즈는 KBO리그 최초로 4년 연속 100타점을 달성했다.
그리고 우즈의 방망이는 가을에 더 빛났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는 침묵하던 방망이가 한국시리즈에서 대폭발했다. 우즈는 한국시리즈 6경기에서 9안타 홈런 4개 8타점 타율 0.391과 출루율 0.483 무려 0.957의 장타율을 기록하며 베어스 통산 세 번째 우승이자 한국 무대에서 첫 우승을 경험했다. 우즈는 시리즈 MVP를 수상하며 MVP 트리플 크라운의 주인공이 됐다.
시즌이 종료된 후 두산은 언론을 통해 우즈와 ‘종신 계약’을 추진한다고 했다. 물론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웃자고 한 말도 진지하게 기사를 만드는 언론을 생각한다면…
그런데 우즈가 두산과 계약 전 주니치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면서 잠시 긴장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23만 1000달러에 두산과 계약. 한국에서 다섯 번째 시즌을 맞이하게 됐다.
하지만…
2002년 우즈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우즈가 아니었다. 전반기 홈런 17개 49타점을 기록했으나 타율은 0.261로 매우 저조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문제는 8월에 발생했다. 부상 치료차 미국으로 떠난 그는 두 번이나 귀국 날짜를 어기며 시즌 막판 4강 경쟁하는 팀에 절대적인 민폐를 끼쳤다. 이에 코칭스태프는 징계 차원으로 입국 후에도 2군행을 지시하기도…1군 복귀 후 우즈는 잠시 맹타를 휘둘렀지만 결국, 두산은 4강에서 탈락했다. 여기에는 분명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우즈였다.
2002시즌 우즈는 119경기에 출장 타율 0.265 홈런 25개 82타점으로 한국에서 5시즌 동안 가장 좋지 않은 성적을 남겼다. 그래도 두산은 우즈와 계약을 원했다. 하지만 우즈는 두산이 아닌 일본 요코하마와 계약을 했다(이로 인해 2002시즌 태업을 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들도…). 한국에서의 시간이 5년에서 멈추게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일본에서의 성공 여부에 대해 회의적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우즈는 일본 진출 첫해 40홈런으로 홈런 공동 1위에 올랐고 두 번째 시즌이었던 2004시즌에도 45홈런으로 역시 공동 1위에 올랐다. 이듬해 거액을 받고 주니치로 이적한 우즈는 나고야에서도 강력한 대포를 가동했다. 특히 2006시즌 47개의 홈런으로 일본 진출 후 최다홈런이자 세 번째 홈런왕에 이름을 올렸다.
우즈는 일본에서 6시즌 동안 824경기 타율 0.289 홈런 240개 616타점을 기록하는 등 오히려 상위리그에서 더 강력한 모습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산 시절 많은 팬들에게 사랑받던 우즈는 없었다.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부와 명성을 얻었으나 인간성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상대 선수의 귓방망이(?)를 날리는 사건도 있었고, 요미우리 이승엽에게 시비를 거는 등 그 옛날 순박했던 우즈는 없었다. 우즈는 2008년을 끝으로 일본 생활을 마감하고 현역에서 은퇴. 한때는 부동산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근황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말년(?)에 연봉 문제로 구단과 마찰을 일으켰던 우즈. 그러나 만약 어느 정도 대우받고 한국에 남았다면 그는 어떤 활약을 했을까?
개인적으로는 매우 좋아했던 외국인 선수 중에 한 명이 우즈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1998년 42번째 홈런을 치며 새로운 역사를 쓴 것도 있지만 LG와 잠실 경기에서 투구에 맞은 김동수가 마운드로 걸어오자 1루에 있던 우즈가 달려와 마치 NFL에서 보디체크하듯이 김동수를 마운드에서 3루까지 끌고 갔던 벤치 클리어링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야구 외적으로는 1998년 당시 최고의 인기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에 출연했던 것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극중 미달이가 우즈를 너무 좋아해 친구들에게 ‘우즈 만세’를 외쳐야만 먹을 것을 주고, 할머니 선우용녀도 우즈를 매우 좋아했던 내용으로 전개. 당연히 우즈도 출연했던…).
우즈는 역대 최고의 외국인 거포였다. 우동수/우동학 트리오의 한 축이었던 우즈. 사실 한국에서 말년에 좋게 헤어진 것이 아니기에 그의 모습을 다시 한국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역시 호세처럼 다시 한번 우즈를 한국에서 보고 싶다.
● Tyrone William Woods - 한국명 : 타이론 우즈
● 1969년 08월 19일생
● 우투/우타/내야수
● 1988년 드래프트 5라운드 몬트리올 지명
● 주요 경력 : 1998-2002 두산 -> 2003-2004 요코하마 -> 2005-2008 주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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