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1998시즌 쿨바, 1999시즌 카날리에 이어 2000시즌에도 3루수 출신의 외국인 선수를 물색했다. 그리고 선택한 인물이 백인 내야수 ‘탐 퀸란’이었다. 현대는 퀸란과 연봉 12만 달러, 옵션 8만 달러에 계약했다.
퀸란은 매우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으로부터 야구와 아이스하키 선수로 동시에 뛰는 조건으로 장학금을 제안을 받았다. 또한, NHL 캘거리 플레임스에 4순위로 지명됐으나 야구를 선택했다(1986년 ML드래프트 27라운드에서 토론토에 지명받았다). 대부분 시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퀸란은 1990년 드디어 빅리그 무대를 밟았다. 그리고 4시즌 통산 42경기를 뛰었고, 토론토 시절에는 월드시리즈에서 백업 선수로 출전해 우승 반지를 획득하는 행운(?)을 얻었다.
스프링캠프에 합류한 퀸란은 수비면에서는 최정상급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방망이였다. 그는 소극적인 스윙으로 볼을 맞히는 유형의 선수였다. 게다가 마이너리그 시절 출전 기회가 줄어들면서 배트 스피드까지 떨어져 있었다. 결국, 현대 코칭스텝은 퀸란과 상의 끝에 타격폼을 바꾸기로 했다. 이전보다 큰 스윙과 함께 히팅 포인트를 앞쪽에 두면서 배트 스피드를 올리는 데 주력했다. 그런데 이런 변화에 누구보다 퀸란 스스로가 더 적극적이었다. 야간 훈련, 특타도 자청하면서 ‘연습 벌레’로 불릴 정도로 성실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노력은 시즌 개막과 함께 강력한 폭발로 나타났다.
2000시즌 개막전 퀸란은 무려 3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단숨에 주목받는 외국인 선수가 됐다. 이틀 후, 다시 한 경기 3개의 홈런으로 시즌 개막 일주일이 지나가기도 전에 6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런데 이런 ‘괴물 모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애초에 ‘수비형 용병’으로 알려지면서 다른 팀에서도 크게 견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서운 파워를 과시하자 집중 견제 대상이 됐다. 그러면서 그는 홈런 타자가 아닌 ‘삼진 타자’가 됐다. 소위 ‘모 아니면 도’식의 타격이 이어진 것이다. 한동안 삼진만 당하다가 갑자기 폭발해서 홈런을 가동, 또다시 침묵 등의 패턴이 시즌 내내 이어졌다.
그러자 현대는 윌리엄스의 대체 선수를 물색하면서 퀸란 역시 교체를 검토했었다. 그런데 만약 퀸란을 퇴출했다면 야구 역사가 바뀌었을지도…하지만 퇴출은 되지 않았다. 비록 방망이가 신뢰를 주지 못하지만, 3루 수비는 KBO리그 역대급이었다. 단적인 예로 선상으로 빠지는 타구를 역모션으로 잡아 점프하면서 1루에 정확히 송구하는 것은 퀸란의 전매특허였다. 거구의 몸을 소유한 선수라 순발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타구에 대한 예측, 판단 능력이 뛰어났고, 어깨가 워낙 강해서 느린 타구 여유 있게 처리가 가능한 선수였다.
2000시즌 현대는 박종호-박진만 키스톤 콤비에 이어 3루마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처럼 촘촘하고도 강력한 수비를 자랑. 리그 최강의 내야 수비를 구축했다.
2000시즌 퀸란은 133경기를 모두 뛰며 타율은 고작 0.236을 기록했지만 37개의 홈런으로 리그 3위에 이름을 올렸다. 더욱 그의 진가가 돋보인 것은 포스트시즌에서였다. 삼성과 플레이오프에서 홈런 1개 2타점으로 타율 0.308을 기록했고, 한국시리즈 7경기 모두 출전. 26타수 9안타 홈런 3개 10타점 타율 0.346을 기록했다. 특히 7차전에서는 2개의 홈런으로 팀의 승리를 책임지고 우승으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퀸란은 외국인 선수 사상 첫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며 코리안 드림을 이루게 됐다. 2001년 퀸란은 현대와 계약금 7만 달러, 연봉 10만 달러에 재계약을 했다.
퀸란은 현대 역사상 처음으로 재계약을 이룬 외국인 선수가 됐다. 다만 특이한 것은 다른 외국인 타자들과 달리 홈런과 타점에 대한 옵션을 낮추는 대신, 정확도를 높이는 옵션을 삽입했다. 팀은 ‘공갈포 퀸란’이 아닌 ‘정확한 퀸란’을 원했던 것이다. 문제는 옵션도 퀸란의 ‘공갈 본능’을 막지 못했다.
2001시즌에도 퀸란의 공갈포 본능은 여전했다. 게다가 성실성도 감퇴(?)하고 있었다. 특별한 문제가 없음에도 부상을 핑계로 휴식을 요구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코칭스텝은 ‘퇴출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군까지 가게 된 퀸란은 다시 성실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어쨌든 2001시즌 퀸란은 123경기를 뛰며 타율 0.242 홈런 28개 66타점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현대는 전년도 한국시리즈 상대였던 두산과 다시 만나게 됐다. 2000년 한국시리즈에서 가을 사나이로 MVP에 올랐던 퀸란. 하지만 2001년 플레이오프에서는 ‘가을 공갈포’로 존재감을 알렸다. 플레이오프 4경기에서 14타수에 단 1안타 타율 0.071의 타율을 기록하며 삼진도 6개나 당했다.
그런데도 시즌 후 현대는 재계약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도는 F급에 가까웠지만, 펀치력도 상당했고, 무엇보다도 3루 수비 능력이 확실하게 입증됐다는 것이다(아마도 공격이 아닌 수비만 놓고 보면 지금까지도 KBO리그 역사상 최고의 3루수가 퀸란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구단의 의지와 결정이 아닌 퀸란이었다. 선수 본인이 더는 야구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던 것…
따라서 현대와 퀸란의 인연은 단 2시즌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야구를 안 하겠다고 선언했던 퀸란을 LG가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금방 퇴출당했지만, 도대체 왜? LG는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일까? 어쨌든 한국을 떠난 퀸란은 현역에서 은퇴한 후, 한때 개인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 Thomas Raymond Quinlan - 한국명 : 탐 퀸란
● 1968년 3월 27일생
● 우투/우타/내야수
● 1986년 ML 드래프트 27라운드 토론토 지명
● 1990년 9월 4일 ML데뷔
● 주요 경력 : 1990, 1992토론토 -> 1994필라델피아 -> 1996미네소타 -> 2000-2001현대 -> 2002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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