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2000년 스미스와 재계약을 하고 남은 한 자리를 메이저리그 출신의 강타자 ‘훌리오 프랑코’를 선택했다. 그런데 프랑코는 이전에 KBO리그 무대를 밟았던 선수들 아니 현재까지 커리어로 프랑코를 넘는 외국인 타자는 없다. 즉 당시 삼성의 선택은 매우 쇼킹한 일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연봉 18만 달러, 옵션 2만 달러 등 총액 단 20만 달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물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프랑코는 입단 연도였던 2000년을 기준 메이저리그 통산 16시즌 동안 타율 0.301 홈런 141개 981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1990년 아메리칸리그 타격왕으로 KBO리그 용병 역사상 최초의 메이저리그 타이틀 홀더였다. 이 밖에도 1988-1991년까지 4년 연속 2루수 부문 ‘실버슬러거’ 수상과 1994년 지명타자 부문 실버슬러거 수상 등 통산 5차례나 실버슬러거로 이름을 올렸다. 한 마디로 ‘급이 다른’ 선수였다. 또한 일본에서도 2시즌을 보내면서 화려함, 그 자체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삼성 입단 당시 1961년생으로 알려지며 한국 나이 40세로 발표됐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나이는 정확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프로필에는 1958년생으로 나와 있지만 도미니카 출신인 그가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기 위해 애초에 나이를 속였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한국을 떠나 빅리그로 복귀 했을 때, 그를 ‘할아버지 선수’라고 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메이저리그에서 내야수로 뛰었던 그에게 삼성은 외야로 이동은 요구했다. 이에 흔쾌히 수긍했던 프랑코에게 많은 이들이 “메이저리거의 프로 정신(?)”을 운운하기도 했다.
프랑코는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는 선수답게 몸 관리에 있어서 철저했고, 정신력-근성이 매우 훌륭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나름 리더십도 있었다. 캠프에서 외국인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큰형님처럼 선수들에게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다만 이것이 과하면 우리나라 정서에서는 월권행위가 되기도…).
시범경기에서 예열을 마친 프랑코는 시즌이 시작되자 초반부터 불꽃 타격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독특한 타격폼을 소유한 그는 파워, 정교함에 있어서 말이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쉽게 말해서 공격에서는 약점이 없는 선수로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고르게 상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4월 프랑코를 퇴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부상이던 김기태가 회복하면 외야 자원은 포화 상태가 될 것이고, 타격을 제외하면 수비와 주루에서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프랑코를 대신해서 10승이 가능한 투수를 찾았다. 어이없는 것은 내야수를 외야로 돌린 것은 삼성 코칭스태프였다. 아무리 메이저리그에서 10년 넘게 뛴 선수도 포지션을 이동하면 수비가 불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프랑코는 외야수로 단 9경기만을 뛰었던 선수다. 어쨌든 프랑코의 교체를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한번 문제가 발생했다. 이유는 사실문제라기보다 문화 차이였다. 내용인즉슨 팀에 코치가 있음에도 프랑코가 직접 나서서 원포인트 레슨을 한 것이다. 이에 삼성 코칭스태프는 그를 건방지게 생각했다. 그리고 스트라이크 존에 잦은 불판을 표출하면서 심판들과 대립. 역시나 한국 야구를 무시하고 건방진 외국인으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프랑코는 안하무인처럼 행동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한국 룰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여기서 우리는 꼰대라는 단어를 쓸 이유가 없다. 당시 우리나라 정서는 그랬으니까…특히 외국인 선수들에게는 함부로 말하는 지도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감독직에 있을 때 항상 트러블을 일으켰던…대표적으로는 김##, 유##).
아무튼 이런저런 우여곡절 속에 프랑코는 2000시즌 132경기에 출장 타율 0.327 홈런 22개 110타점을 기록하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괴력을 보였다. 충분히 재계약해야 할 성적이었다. 그런데 퇴출이라는 철퇴를 맞았다. 삼성은 2000시즌을 끝으로 김용희 감독을 경질하고 김응룡 감독을 선임했기 때문이다. 신임 김응룡 감독은 발이 느리고, 수비도 불안한 프랑코를 그대로 보내기로 했다. 만약 프랑코의 커리어가 그렇게 끝났다면 김응룡 감독의 선택이 백번이고 천번이고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외면당한 프랑코는 다시 메이저리그로 복귀했다. 그리고 재계약에 실패한 것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후배들에게 한국에 대해 험담하면서 한국 리그에 못 가도록 브로커(?) 역할을 했다. 공교롭게도 2000년 현대에 입단했던 에디 윌리엄스도 프랑코와 함께 마이너에서 이런 짓을 했다는 것. 어쨌든 애틀란타와 계약에 성공한 프랑코는 2001년부터 빅리그에서 활약했다. 또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애틀란타의 1루수로 매년 100경기 이상을 소화했다. 애틀란타 1루수로 활약을 하는 프랑코를 본 김응룡 감독은 “누가 쟤를 퇴출했냐?”라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프랑코는 2008년 49세의 나이로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때도 그의 나이는 이미 50을 훌쩍 넘었을 것이라는 의혹은 끝나지 않았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프랑코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6년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 코치로 온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한때 한국에 대해 험담하고 다녔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프랑코는 롯데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다가 2020년을 끝으로 한국을 떠났다. 이후 현재는 마이너리그의 코치를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한 시즌이기는 했지만, 프랑코의 활약은 훌륭했다. 무엇보다 그의 독특한 타격폼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아무튼 지도자로도 계속된 활약을 보여주길 바란다. 비록 래리 서튼은 실패로 끝났지만, 프랑코에게 기회가 온다면 꼭…
● Julio Cesar Franco - 한국명 : 훌리오 프랑코
● 1958년 8월 23일생
● 우투/우타/외야수
● 1982년 4월 23일 ML데뷔
● 주요 경력 : 1982 필라델피아 -> 1983-1988 클리브랜드 -> 1989-1993 텍사스 -> 1994 시카고W -> 1995 지바 롯데 -> 1996 클리브랜드 -> 1997 밀워키 -> 1998 지바 롯데 -> 1999 템파베이 -> 2000 삼성 -> 2001-2005 애틀란타 -> 2006 뉴욕M -> 2007애틀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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