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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용병/현대 유니콘스

추억의 용병 21 - ‘유니콘스 마지막 4번 타자’ 클리프 브룸바

by 특급용병 2023.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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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행동을 일삼던 프랭클린을 퇴출한 현대는 대체 선수로 클리프 브룸바와 계약금 3, 연봉 7만 달러에 계약했다. 그리고 그가 유니콘스 역사상 최고의 용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브룸바는 메이저리그 경험이 거의 없던 선수였다. 2001년 텍사스와 콜로라도에서 21경기를 뛰면서 타율 0.217을 남긴 것이 전부였다. 다만 백인 선수와 궁합이 잘 맞았다는 징크스(?)를 기대할 뿐이었다(실패 사례도 있었지만 쿨바 퀸란 모두 백인으로 우승 용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팀 합류 당시 아무도 그를 야구선수로 생각하지(?) 않았다. 김재박 감독은 야구 글러브 보다 격투기 글러브가 더 어울릴 것 같다라고 첫인상을 평가했다. 외국인 투수 바워스는 분명 마피아 출신일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우람한 덩치에 인상은 리그를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음산(?)해 보였던 것. 게다가 합류 첫날 심정수와 프리배팅 대결을 하면서 강한 승부욕과 자신감도 보여줬었다.

 

현대 코칭스텝은 심정수 외에 강력한 중심타자가 없던 차에 브룸바의 합류는 타선의 무게를 강화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하루, 이틀 지나면서 사라지게 됐다. 오히려 시간이 충분히 흘렀음에도 그의 타격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수비형 용병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브룸바의 문제점은 상체 위주의 스윙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배트 스피드와 정확도가 떨어져서 좋은 타격 결과가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야 땅볼과 힘없는 플라이는 그의 전매특허(?)였다. 그래서 찬스 상황에서는 삼진당하는 것이(?) 팀을 위한 일이었다. 코칭스텝의 믿음에도 그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대수비 요원으로 전락했고,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됐다(이런 브룸바를 현대 팬들은 바밤바로 부르기도 했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조롱의 의미가).

 

팀이 우승으로 가는데 걸림돌이었던 브룸바. 그런데 갑자기 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8월 중순 이후 브룸바는 연일 맹타를 휘두르며 순위 경쟁을 하는 팀에 보템이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더니 계륵에서 팀의 중심타자로 올라서기도 했다. 브룸바가 이런 변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코칭스텝의 믿음과 김용달 코치와 노력한 덕분이었다. 김용달 코치는 기본적인 요소까지 모두 뜯어고쳤고, 브룸바는 기꺼이 받아들이며 백조로 변신하게 된 것이었다.

 

초반 수비형 용병의 오명을 떨친 브룸바는 2003시즌을 70경기를 뛰면서 타율 0.303 홈런1451타점으로 마감했다. 그리고 그의 진가는 한국시리즈에서 발휘됐다. 브룸바는 한국시리즈 7경기를 모두 뛰면서 타율 3할과 함께 무려 10타점을 기록하며 팀 우승의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만약 정민태의 3승이 없었다면 MVP는 브룸바의 차지였을 것이다.

브룸바는 계약금 5, 연봉 15만 달러에 현대와 재계약을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 그는 리그를 지배하는 괴물이 되었다. 적어도 한국 야구인들이 담합(?)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2004시즌 브룸바는 타율, 홈런, 타점, 출루율, 장타율 등 도루를 제외한 전 부문 선두 혹은 top5 안에 이름을 올렸다. 홈런 페이스에서는 과거 타이론 우즈(두산)보다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2004시즌 브룸바는 완벽한 선수였다. 역대 그 어떤 외국인 선수들보다 정확성이 뛰었고, 힘에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브룸바도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타격 부문 독주에 7개 구단 지도자들과 야구인들은 브룸바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후 어느 시점부터 상대는 브룸바를 철저하게 피해 가기 시작했다. 견제를 넘어 한국인들의 담합(?)은 브룸바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한국 선수들이 해외에서 견제 혹은 불이익을 받으면 비판하던 국내 야구인들 도대체 외국인 선수들에게는 왜 이러는 것일까? 과거 우즈-호세도 그랬고치졸함에 있어서는 일본 야구에 못지않았다).

 

상대가 피하자 브룸바는 조급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쁜 볼에 방망이가 나가고 자연스럽게 타격 밸런스도 완전하게 무너졌다. 결국 전 부문 1위를 달리던 타격 타이틀을 하나, 둘씩 내주게 됐다. 브룸바는 역대 최초로 외국인 선수로 수위 타자등극과 출루율-장타율 1위가 된 것과 팀이 2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으로 위안 삼아야 했다(참고로 시즌 MVP도 브룸바가 아닌 배영수에게 돌아갔다. 사실 2004년 시즌 MVP는 브룸바, 신인왕 권오준이 옳은 것이었다. 결국 돈 있는 삼성이냐, 돈 없는 현대의 싸움과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브룸바는 밀린 것이다).

 

브룸바가 맞이한 두 번째 한국시리즈. 기록적인 면에서는 전년도에 비해 떨어졌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외야수가 아닌 3루수로 시리즈를 뛰었다는 것이다. 2004시즌 막판 병역 비리 사태가 터졌고, 현대는 당시 주전 3루수였던 정성훈이 연루되면서 3루가 구멍 났다. 그래서 대안으로 브룸바가 시즌 막판부터 3루수로 뛰는 희생정신(?)을 발휘했었다.

 

물론 수비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다만 몸으로 타구를 막고, 강한 어깨로 승부를 보는 방법을 택했다. 그의 살신성인 자세는 한국시리즈에서도 계속됐다. 9차전까지 가는 초유의 접전 끝에 현대는 통산 4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브룸바는 한국에서 2년 연속 우승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시즌 중반 이후 브룸바의 일본 진출설은 꾸준히 흘러나왔다. 그런데 시즌이 종료되자 급물살을 탄 것이다. 결국 브룸바는 현대가 아닌 오릭스를 선택했다. 한국 팀이 일본과 머니 게임으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결국 브룸바와 결별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국을 떠난 그의 일본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첫해 124경기에 출전하며 19홈런 57타점을 올렸던 그는 이듬해 47경기만 나오면서 2년간의 일본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현대를 선택했다. 브룸바는 2007년 계약금 5, 연봉 25만 달러에 현대로 돌아왔다.

 

현대로 돌아온 브룸바는 일본 생활 실패 원인을 이렇게 말했다. “현대에서 아웃이 되면 동료들이 'next time'을 외치며 나를 독려해줬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내가 아웃이 되면 매우 차갑게 바라봤다.”라고 말이다. 핑계가 될 수 있지만 그만큼 그에게 한국은 따뜻한 곳이었다.

 

3년 만에 복귀한 그는 초반부터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과거의 기량이 사라졌다는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브룸바는 한국 복귀 첫 시즌이자 현대 왕조의 마지막 시즌을 모두 소화해냈다.

 

브룸바는 126경기 모두 출전, 타율 0.308 홈런2987타점을 올리며 현대 소속으로 마지막 시즌을 보냈다. 특히 시즌 막판 김시진 감독은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홈런왕 경쟁은 물론 마지막까지 팀과 함께하겠다는 의리(?) 있는 모습도 보여줬다.

 

브룸바는 생각처럼 홈런왕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현대 왕조의 마지막 4번 타자로 끝까지 팀을 지켜주었다. 시즌이 종료되고 현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그는 늘 팀을 걱정하며 새로운 주인을 만나길 기다렸다. 분명 그는 우즈나 데이비스처럼 많은 사람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현대가 인기 있는 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보여준 플레이만큼은 최고였다. 또한, 그가 새롭게 야구에 눈을 뜰 수 있게 된 곳이 한국이었다.

 

이후 한국에서 히어로즈 소속으로 2시즌 더 뛰었다. 하지만 그는 현대 왕조의 마지막 외국인 선수였고, 마지막 4번 타자였다.

 

한때 LG-한화 입단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설에 그쳤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현역에서 은퇴 후 브룸바는 8년째 야구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물론 이것도 2019년의 근황이었다. 어쨌든 그는 그 당시에도 그는 여전히 한국 팬들을 기억하고, 한국 팬들을 사랑한다고 한다. 또한, 현대에서 한국시리즈 2연패를 할 때를 야구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꼽기도 했다.

 

만약 팀이 존재했다면 그의 시구도 기대해 볼 수 있었을 텐데팀이 없기 불가능하다. 그러나 브룸바는 현대 유니콘스 최고의 외국인 선수이고, 마지막 4번 타자였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러나 수원 야구장에 울렸던 그의 응원 구호, “Go~Go~! ! !”가 여전히 귓가에 선하다. 그리고 그가 등장할 때 수원 야구장에 울려 퍼지던, “Here I go”는 음산함과 함께 현대 팬들에게 한방을 기대하게 했던 그 시절의 느낌도 여전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다시 좋은 소식을 한국 팬들에게 전해주기를 기대하고 항상 그를 응원한다.

 

● Clifford Michael Brumbaugh - 한국명 : 클리프 브룸바

● 1974년 4월 21일생

● 우투/우타/외야수

● 1995년 ML 드래프트 13라운드 텍사스 지명(전체 346순위)

● 2001년 7월 24일 ML데뷔

● 주요 경력 : 2001 텍사스-콜로라도 -> 2003-2004 현대 -> 2005-2006 오릭스 -> 2007 현대 -> 2008-2009 히어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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