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3승과 평균자책점 타이틀 홀더였던 바워스의 어깨 부상으로 결별을 하는 대신 새로운 우완투수로 ‘마이크 피어리’를 영입했다.
피어리는 메이저리그에서 5시즌 동안 84경기를 뛰며 2승 11패(평균자책점 4.00)를 기록했었다. 또한 일본 지바 롯데에서 1년간 뛰는 등, 2003년 뛰었던 바워스처럼 동양 야구 경험이 있던 인물이었다. 또한 커리어만 놓고 본다면 역대 현대 유니폼을 입은 외국인 투수들 가운데 가장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투수였다. 이런 피어리가 현대와 20만 달러에 계약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외국인 선수들이 다 그랬다. 또한, 시즌을 앞둔 시점에서 피어리의 몸값이 실상 상당하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당초 피어리는 140km 초반의 빠른 볼과 커터를 비롯한 다양한 구종을 앞세우며 힘보다는 기교로 승부하던 바워스와 비슷한 스타일의 투수로 평가됐다.
시즌 개막과 함께 3연승 행진을 하며 피어리의 신뢰도는 더욱 올라갔다. 또한 바워스의 기억을 지우기에도 충분했다. 또한 140km 초반을 유지한다는 구속도 알려진 것과 달리 140km 중반 이상을 기록하는 위력적인 볼을 선사했다. 여기에 그의 커터는 마구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피어리는 시즌이 한 달도 흘러가기 전에 큰 위기에 빠지게 됐다. 4월말 타자가 친 타구에 무릎을 맞는 부상을 당했다. 물론 전력에서 제외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3연승 할 때의 모습과 전혀 다른 투수가 됐다. 구속은 140km초반에서 그 이하로 떨어지면 대략 7~10km정도가 줄었다. 또한 완전 홈런 공장장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5월에 시즌 네 번째 승리를 추가한 이후, 거듭된 부진 속에 퇴출 대상으로 전락했다. 갑작스러운 구위 저하, 늘어나는 피홈런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에이스 정민태의 갑작스러운 부진으로 현대는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루빨리 퇴출을 해야 할 상황에서 피어리는 반전을 이뤄낸다.
7월초 시즌 5승째를 거두면서 부활을 알렸다. 여전히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5승 달성 이후 피어리는 무려 12승 1패를 기록하며 퇴출이 아닌 명실상부한 현대 에이스로 변신했던 것이다. 참고로 피어리의 6패 가운데 5패가 5승을 달성하기 이전에 당한 패배였다. 따라서 어마무시한(?) 페이스를 보여준 것이다.
게다가 부상 이전 140km 중반의 구속은 부상 회복 이후 더욱 빨라졌다. 무릎 부상이 회복된 이후 그는 147km의 빠른 볼과 그의 장기였던 ‘커터’를 앞세워 승승장구했다. 결과론이지만 부상 없이 한 시즌을 소화했다면 리그 최고의 투수로 20승도 가능했을 것이다.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한 현대는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만났다. 그리고 피어리가 1차전 선발로 나섰다. 피어리는 벤치의 믿음대로 1차전 2실점으로 호투하며 승리 투수가 됐다. 이후 1승1패1에서 4차전에 다시 선발 등판해 배영수와 최고의 투수전을 펼쳤다. 그러나 6회 끝나고 그는 마운드를 내려갔다. 이날 피어리의 강판에 대해 삼성 김응룡 감독은 부상을 거론하며 흔들기를 시도했고, 현대는 사실무근이라고 맞섰다. 하지만 사실 부상이 맞았다.
시리즈 전적 2승3무2패로 KBO역사상 최초의 한국시리즈 8차전에서 현대는 피어리를 내세웠다. 그가 선발로 등장함에 따라 부상 의혹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우려는 경기에서 나타났다. 1회 첫 타자를 상대할 때 이상 징후를 보이던 그는 1회를 채우지 못하고 강판됐다. (경기는 현대가 승리했다. 또한 사상 초유의 9차전 폭우 속에서 현대가 승리하면서 현대는 해태 이후 두 번째로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팀이 됐다.)
시리즈가 끝나고 그는 또 하나의 럭비공이었다. 브룸바와 함께 시즌 중에 일본에서 그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고, 그를 원하는 팀도 있었다. 현대는 피어리를 재계약 방침을 세웠지만 일본이 아닌 다른 변수가 발생하고 말았다.
피어리는 재계약 의사를 밝힌 현대에 “메디컬 테스트를 하지 않는다면 계약을 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어깨 상태는 검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피어리는 거부하며 자신의 부상을 숨기고 계약을 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결국 피어리와의 인연도 1년으로 끝이 났다. 피어리는 일본 진출도 실패했다. 이후 야구계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고, 최근 근황은 알 수 없다.
분명 현대 왕조의 마지막 우승의 주역이었던 훌륭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재계약 테이블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정 떨어지게 만든 또 다른(?) 한 명이었다. 그러나 비록 헤어짐이 좋지 않았지만 한 번쯤 보고 싶은 인물이기도 하다.
● Michael Edwin Fyhrie - 한국명 : 마이크 피어리
● 1969년 12월 9일생
● 우완 투수
● 1991년 ML 드래프트 12라운드 캔자스시티 지명(전체315순위)
● 1996년 9월 14일 ML데뷔
● 주요 경력 : 1996뉴욕M -> 1997지바 -> 1999-2000애너하임 -> 2001-2002오클랜드 -> 2004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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