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시즌 16승을 올린 에이스 피어리가 메디컬 테스트를 거부하면서 재계약에 실패했다. 현대는 피어리의 대체 선수를 물색한 끝에 ‘미키 캘러웨이’를 계약금 5만, 연봉 25만 달러 등 총액 30만 달러에 영입했다.
캘러웨이는 템파베이를 시작으로 애너하임-텍사스등을 거치면서 5시즌 동안 40경기, 4승 11패를 기록한 선수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입단 당시 나름 주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메이저리그에서 박찬호와 맞대결을 펼쳤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캘러웨이는 2003년 4월 애너하임 소속으로 박찬호와의 선발 맞대결에서 6이닝 무실점으로 승리 투수 됐다. 또한 2004년에는 텍사스로 이적해 2경기 연속 호투로 박찬호와 선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박찬호에게는 그리 좋은 기억이 없는 인물일 수도…).
어쨌든 140km 초, 중반의 구속과 다양한 구종을 앞세운 기교파 스타일로 알려졌었다(도대체 몇 가지를 던져야 다양한 것일까? 외국인 투수 중 파워 피처가 아니면 100% 이런 평가를…). 다만 피어리에 비해 강력함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5시즌 캘러웨이는 ‘대박 카드’였다. 그는 성실하게 끊임없는 연구를 하는 선수였다. 그런데 사실 프로 선수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연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우리나라의 정서상…어쨌든 캘러웨이는 2005시즌 32경기 등판 197.1이닝을 소화하며 16승 9패 3.9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훌륭한 성적에도 아쉬웠던 것은 다승 2위에 머물렀다는 것이다(당시 1위는 손민한으로 18승). 만약 현대의 타선과 불펜이 2004년 수준이었다면 20승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듬해 캘러웨이는 계약금 5만, 연봉 29만 달러 등 총액 34만 달러에 재계약을 했다. 이는 현대 유니콘스 역사상 첫 외국인 투수 재계약의 주인공이 됐다. 그리고 두 번째 시즌 캘러웨이는 강력한 에이스로 업그레이드 된 모습을 보여줬다. 일명 ‘NF볼’이라는 마구를 탄생시켰다.
‘NF볼’은 ‘너클 포크볼’의 신조어였다. 캘러웨이는 포크볼이라고 주장을 했다. 그러나 현대 관계자들은 너클 볼이라고 주장(?)을 했던 것…결국 절충안(?)으로 ‘너클 포크볼’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한 것이다. 캘러웨이의 NF볼은 던지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어디로 올지 모르는 이상한(?) 볼이었다. 당시 김동수 포수는 캘러웨이의 NF볼이 발등에 꽂혔던 일화도 있었다.
어쨌든 시즌 초반 평균자책점 1위에 등극하는 등, 맹활약하던 그는 5월 어깨 통증으로 잠시 1군에서 제외가 됐다. 이후 다시 복귀했지만 부진은 계속됐다. 그렇게 약 3개월의 힘든 여정(?)을 펼치던 그는 ‘보약 삼성’을 만나 부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06시즌 팀의 에이스로 14승 7패 평균자책점 2.87을 기록하며 팀의 PS 진출의 주역이 됐다. 비록 첫 시즌보다 승수가 적었지만, 평균자책점에서는 1점이나 떨어뜨리며 다시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다. 시즌 후 일본 야쿠르트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 문화에 녹아들었던(?) 그는 다시 현대를 선택했다.
캘러웨이는 ‘동태탕’ 마니아였다. 경기가 없는 날에는 혼자 식당을 찾을 정도였고, 본인의 한국 이름을 ‘이태원’으로 만들 정도로 한국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허상(?)이었음을 세 번째 시즌에 보여줬다. 현대에서 세 번째 시즌 캘러웨이는 계약금 5만, 연봉 33만 등 총 38만 달러에 재계약을 했다.
2007시즌에도 캘러웨이는 여전히 삼성에게 강했다. 통산 9경기에서 8승 무패를 올렸다. 참고로 KIA전 7연승을 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었다. 6월초 팔꿈치 통증 호소를 하며 1군에서 제외, 국내 병원에서 검진받았다. 그 결과 수술 없이 재활이 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본인은 미국행을 원했고, 미국에서 검진받았다. 그러나 재활 의지가 없던 그는 구단에 방출을 요구했다.
현대는 그의 요구대로 임의탈퇴 처리를 해줬다. 또한 잔여 연봉도 모두 지급해줬다. 그러나 그의 꼬장(?)이 발동됐다. 바로 수술비를 요구했던 것. 당시 현대 사정은 최악이었다. 그러나 구단 사정이 좋았다고 해도 그에게 수술비를 지급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그동안 좋았던 이미지(?)는 한순간에 날아갔다. 끝이 아주 지저분한 인물 중의 한 명이었다.
한국을 떠난 이후 2009년 대만에서 잠시 뛰었으나 부상으로 방출됐다. 2013년 클리브랜드 투수코치로 ML 무대에 승격됐다. 이후 좋은 투수코치로 불리기도 했던 캘러웨이는 2017년 10월 뉴욕 메츠 감독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2019시즌을 끝으로 메츠에서 감독 생활을 끝내고 2020년 LA 에인절스의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그래도 좀 성공하길 기대하려고 했지만, 성추문에 연루되면서 구단에서 쫓겨났다. 2022년까지는 메이저리그/마이너리그 모두 계약을 할 수 없었던 그는 현재는 멕시칸 리그에서 감독 생활을 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좋지 않았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인물이다.
● Michael Christopher Callaway - 한국명 : 미키 캘러웨이
● 1975년 3월 15일생
● 우완 투수
● 1996년 ML 드래프트 7라운드 템파베이 지명(전체214순위)
● 1999년 6월 10일 ML데뷔
● 주요 경력 : 1999,2001템파베이 -> 2002애너하임 -> 2003-2004텍사스 -> 2005-2007현대
'추억의 용병 > 현대 유니콘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억의 용병 21 - ‘유니콘스 마지막 4번 타자’ 클리프 브룸바 (0) | 2023.07.16 |
---|---|
추억의 용병 19 - ‘친절한 서튼씨’ 래리 서튼 (0) | 2023.07.11 |
추억의 용병 18 – ‘커터의 장인’ 마이크 피어리 (0) | 2023.07.09 |
추억의 용병 17 – ‘젠틀맨’ 셰인 바워스 (0) | 2023.07.05 |
추억의 용병 16 - ‘이상한 용병’ 마이크 프랭클린 (0) | 2023.06.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