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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용병/롯데 자이언츠

추억의 용병 03 – ‘대만 여포’ 테드 우드

by 특급용병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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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시즌 롯데 돌풍의 주역이었던 호세. 시즌 후 재계약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롯데는 당시 규정을 깨고 245만 달러를 제시했다. 그런데도 호세는 계약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 미국행을 선택하며 첫 번째(?) 뒤통수를 쳤다. 롯데는 돌발 변수로 해를 넘긴 2월이 돼서야 호세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있었고, 그 주인공은 백인 타자 테드 우드였다.

 

우드는 미국 청소년 대표-국가대표 출신 선수로 1988년 서울 올림픽 미국 대표로 출전해 5번 타자로 맹활약했다(참고로 당시 4번은 우리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티노 마르티네스였다). 올림픽 당시 우드는 타율 0.474로 타격 3, 8타점으로 이 부문 공동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1989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샌프란스시코에 선택을 받았다.

 

그리고 1991년 샌프란시스코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됐다. 이후 1993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3시즌 통산 47경기에 출전하며 타율 0.183 홈런 17타점을 남긴 후 더는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뛰지 못했다.

 

마이너리그에서 뛰던 우드는 1997년 대만으로 무대를 옮겼다. 그리고 첫해 3관왕(타율 0.374, 139안타, 94타점)을 차지했고, 1999년에는 홈런 19개로 홈런왕에 등극하기도 했다. 비록 대만이 우리나라 리그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았으나 우드는 대만에서 최고의 용병 타자로 활약을 했다. 1999시즌이 종료된 후 슝디에서는 우드에게 16만 달러를 제시하며 강한 재계약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우드는 대만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한국을 선택했다.

 

롯데는 이 백인 용병에게 계약금/옵션 각각 4, 연봉 12만 달러 등 총액 20만 달러를 지불했다. 분명 롯데는 기량 검증이 되지 않은 우드에게 다소 과한(?) 대우를 했다. 그런데 이렇게 대우한 이유가 대만에서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런 황당한 이유가(당시 일부 국내 구단들은 외국인 선수를 평가하는 기준이 없었다)

 

어쨌든 롯데는 우드는 슬러거는 아니지만 배트 스피드가 빠른 호세와 다르게 수비력이나 주력을 갖춘 타자로 평가했다. 또한, 기존 선수와 재계약 실패 후 고정된 멘트(?)를 우드에게도 붙여줬다. 바로 “##보다 낫다.”라는물론 처음에는 잘못된 평가는 아니었다. 우드는 시범경기에서 홈런 3개를 포함해 타율 0.366을 기록했다. 문제는 시범경기에서만 본즈급활약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2000시즌 시작을 3번 타자로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된 헛방망이질이 이어졌다. 우드는 개막후 7경기에서 24타수 3안타 타율 0.125를 기록했고 타순도 3번에서 6번으로 내려갔다. ‘적응 기간이겠지?’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우드는 몸쪽 빠른 볼에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몸쪽에 부담을 느끼면서 자신의 강점이었던 바깥쪽 코스도 완전하게 놓치면서 어정쩡한 타자가 됐다. 결국 롯데는 513일 우드를 웨이버 공시. 퇴출을 결정했다. 우드가 남긴 성적은 35경기 타율 0.255 홈런 19타점이 전부였다.

 

그런데 우드가 조기에 퇴출됐지만 아마도 풀타임으로 뛰었다면 준수한 수준의 활약은 해줬을 것이다. 다만 당시 롯데는 준수한 용병이 아니라 호세와 같은 폭발적인 용병이 필요했다는 것한편 임수혁 선수가 2루에서 쓰러졌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갔던 인물이 바로 우드였다.

 

현재 그의 근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 Edward Robert Wood - 한국명 : 테드 우드

● 1967년 1월 4일생

● 좌투/좌타/외야수

● 1989드래프트 1라운드 SF 지명

● 1991년 09월 04일 ML 데뷔

● 주요 경력 : 1991-1992 샌프란시스코 -> 1993 몬트리온 -> 2000 롯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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