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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용병/현대 유니콘스

추억의 용병 01 - ‘육수왕’ 조 스트롱

by 특급용병 2023.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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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물론 외모도 강력해 보였다.

 

충분히가 아니라 기회만 주어진다면 60세이브도 우습게 할 것 같은 그런 외모를 소유했다. 그런데 마운드만 올라서면 덩칫값, 아니 외모값(?)을 못했다. 위력적인 공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는 마운드에서 소위 말하는 육수 한 바가지를 흘리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렵게 승리를 지켜내면 해맑게 웃던 사나이.

 

그는 바로 KBO리그 최초, 현대 유니콘스 최초의 외국인 선수 조 스트롱이다.

 

활약상을 떠나 KBO리그가 존재하는 동안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제1호 외국인 선수. 오늘은 시간을 20세기로 돌려 우리의 빨대(?) 형님을 추억해보고자 한다.

 

1997년 11월…

 

모든 관심은 현대에게 쏠려있었다. 왜냐하면, KBO 역사상 1호 외국인 선수 지명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현대는 무조건 3루 자원을 선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에게 가장 시급한 포지션이 3루였다. 태평양의 마지막 3할 타자였던 권준헌은 현대에서 2시즌 동안 공격의 장점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수비가 불안한 3루수에 불과했다. 그 밖에 염경엽, 안명성, 이근엽 등등 3루를 확실하게 책임질 수 있는 자원은 없었다. 그래서 현대가 3루 자원을 뽑는 것은 당연했고, 그래야만 했다.

 

어차피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는 현대는 사전 작업(?)에 들어갔다. 다만 시작부터 어긋난 것이 문제현대는 수년간 팀 스프링캠프를 통해 내야수 제프 볼이라는 인물에게 공을 들였다. 그 결과 그는 용병 트라이아웃에 참가하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캠프가 시작하자 나타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의 신생구단 애리조나와 템파베이의 창단으로 그의 선택지는 빅리그 캠프였다.

 

그렇다고 현대의 계획(?)이 완전히 꼬인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인물로 타이 게이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애초에 현대행이 확정(?)된 인물이었다. 문제는 사전 담합설로 논란의 중심에 있더니 돌연 캠프를 떠난 것이다. 이제 현대에게 마지막 남은 카드(?)는 캠프 최대어로 꼽히는 마이크 부시였다.

 

그런데

 

지명 당일, 모두가 황당을 넘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현대가 1라운드 전체 1순위 그리고 역사적인 KBO 1호 외국인 선수로 호명한 인물은 마이크 부시가 아니었다. 그리고 3루 자원도 아니었다. 35살의 노장 투수 조 스트롱을 호명한 것이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현대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트라이아웃의 진정한 승자는 한화다.”라고 평가한 것.

 

그도 그럴 것이 캠프 최대어 타자가 부시였다면 투수는 호세 파라 혹은 빅터 콜이었다. 물론 스트롱도 좋은 피칭을 했지만, 인지도(?)가 많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KBO리그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대만에서 오랜 기간 뛰었다는 이력과 1997년을 통으로 쉬었다는 점이 불안요소였다.

 

하지만 외부평가와 다르게 현대 구단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완벽히 몸을 만들어서 캠프에 참가했다는 것과 에이전트가 한국인이라 동양 문화적응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어쨌든 현대는 스트롱과 계약금 2, 연봉 8, 정착금(?)조로 2만 달러를 지불하며 총액 12만 달러에 계약했다. 이후 스트롱은 구단과 수시로 연락하며, 2월 캠프가 아닌 1월에 한국으로 입국해 팀에 합류했다. 또한, 구단은 개인 숙소를 마련해 주려고 했지만, 숙소 생활을 자처하기도

 

외국인 선수에 대한 기대보다 문화차이로 걱정과 염려가 더 많았던 시대에 스트롱은 이런 우려를 완전하게 불식시켰다. 그뿐 아니라 김치 맛(?)도 이미 알고 있었고, 삼겹살과 국밥에 깍두기도 한국인처럼 소화하는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IMF 외환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에 스트롱은 자신도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겠다며, 자신이 소지하던 금도 쾌척하면서 생활은 이미 에이스급이었다.

 

문제는 기량!

 

캠프 당시 김재박 감독은 “BEST 상태의 정민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라고 극찬할 정도로 좋았다. 특히 메이저리거들이 주축이 된 피치버그와 연습경기와 일본 마무리 캠프에서도 좋은 피칭으로 현대의 새로운 마무리이자 흑색 돌풍을 예고한 것이다.

 

하지만 1998시즌 데뷔전부터 수입산 롤러코스터의 진수를 보여줬다.

 

쌍방울과 경기에 등판한 스트롱. 팀이 앞선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랐다. 그러나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며 연속 볼넷을 허용하더니 급기야 밀어내기 볼넷 신공으로 동점에 이은 역전을 허용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단 한 개의 스트라이크를 잡지 못하고 패전 투수가 된 것이다. 곧바로 다음 날 그는 한국 무대 첫 세이브와 함께 첫 스트라이크를 기록했지만, 여전히 그의 행보는 불안해 보였다.

 

역시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스트롱은 524일부터 619일까지 11경기 연속 구원에 성공, 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팀 동료들에게는 공포의(?) 마무리 투수였다. 1998시즌 현대는 리그를 압도하는 전력으로 스트롱이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더라도 타선의 힘으로 역전 시키며 구원승으로 둔갑시켜주었다. 동점 그리고 역전 흐름에서 겨우겨우 막아내며, 세이브를 기록하는 경기도 수없이 많았다.

 

결국, 팀 빨로 리그 구원 부분 선두를 여유있게 지키더니 시즌 후반 등판 횟수가 줄어들면서 구원왕 타이틀도 임창용에게 내주며, KBO 최초의 외국인 구원왕에 실패했다. 1998시즌 현대에게 유일한 약점은 마무리 스트롱이었다. 그는 당초 기대와 달리 점점 계륵과 같은 존재가 됐다.

 

현대가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 짓던 날, 땀인지 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를 흘리며 기뻐하던 그의 모습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이는 스트롱이 한국 마운드에서 누릴 수 있는 마지막 기쁨이었다. 스트롱은 1998시즌 53경기 출장 6524세이브 평균 자책점 2.95로 시즌을 마감했다. 외형적으로는 준수한 마무리였지만 만약 요즘처럼 블론 세이브나 세부 스탯을 철저하게 따진다면한숨이

 

현대는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그리고 LG와 우승을 놓고 6경기를 치르는 동안 스트롱은 단 한 차례도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이미 현대 코칭스텝은 그를 마무리에서 배제한 것이다. 그런데도 6차전에서 우승 후 기념 촬영 때 누구보다도 해맑게 웃고 있던 모습은 한국에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됐다.

 

스트롱은 150km 이상의 강렬한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낙차 큰 커브는 빅리그에서도 통할 수 있는 구위라고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새가슴이었다. 외모는 메이저리그를 평정하고도 남을 선수였지만, 승부 근성이 떨어지고 배장이 없었다.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도록 집요하게 빠른 볼만 노리자 당황해서 제구력이 흔들리는 모습도 보였다.

 

현대는 시즌 종료 후 스트롱과 재계약을 포기했다. 하지만 한국 생활에 미련이 남았던 그는 다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그리고 4라운드에서 해태에 지명을 받았지만, 계약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과 인연이 끝났고, 그는 점점 잊혀지고 있었다.

 

그러던 2000512

 

한국 팬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무려 38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것이다. 참고로 역대 두 번째 최고령 신인으로 데뷔했다. 놀라우면서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물론 그의 활약은 길지 않았다. 2000-2001년 플로리다 소속으로 잠깐 활약하다가 방출된 후 마이너리그에 2004년까지 뛰다가 은퇴했다. 비록 짧은 경험이었지만 그에게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분명 한국에서 그는 나쁜 성적이 아니었다. 다만 리그를 압도할 수준의 강력함이 없었고, 현대가 재계약을 선택했다면 실패한 선수가 됐을 수도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가장 애정이 가는 선수다.

 

강렬한 이름과 독특한 헤어 스타일. 그리고 한국프로야구의 1호 외국인 선수라는 것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요소이기도이미 오랜 추억이 됐지만, 만약 그가 좀 더 대담하고 배짱 있는 선수였다면 당시 현대 전력과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기록적인 면이나 여러 면에서 더 좋은 성적과 더 많은 사랑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2% 부족했던 것이 매우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너무도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의 근황은 알 수 없다.

 

언젠가 현대 유니폼을 입고 시구하기를 기다렸는데팀이 사라져서 현실적으로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됐다. 그러나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보고 싶은 인물이고, 그의 근황이라도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 Joseph Benjamin Strong - 한국명 : 조 스트롱

● 1962년 9월 9일생

● 우완 투수

● 1984년 ML 드래프트 15라운드 오클랜드 지명(전체 376순위)

● 2000년 5월 11일 ML 데뷔

● 주요 경력 : 1998 현대 -> 2000-2001 플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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