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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왕조/왕조의 주역들

국민 유격수 ‘만두’ 박진만 -1편-

by 특급용병 2026.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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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28일…

 

수원에서는 현대와 SK의 시범경기가 있었다. 아마도 이날은 2004시즌을 위한 마지막 시범경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교적 날도 따뜻했던 일요일. 수원 야구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팬들이 찾아왔다. 어쨌든 경기는 끝났다. 야구장에 있던 선수단 그리고 팬들도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현대 코치들이 그라운드 안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현대 김재박 감독이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왔다. 또한 포수 장비를 풀세트(?)로 찬 현대 선수가 백네트 앞쪽에 서 있었다.

 

『필자는 물론 당시 주변에 있던 이들은 백네트 바로 뒤가 아닌 옆쪽에 있어서 누구인지 선수를 식별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주전 포수 김동수의 나이를 고려해 강귀태를 육성하기 위해 개인 훈련을 시키는 줄 알았다.』

 

그리고 정진호 코치가 아닌 김재박 감독이 펑고를 쳤다. 김재박 감독은 보는 이로 하여금 ‘독하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쉴 새 없이 펑고를 쳤다.

 

『과거 야구인들에게는 펑고보다 노크라는 표현을 썼다. 일명 살인 노크, 마스크를 쓰고 지옥의 노크(펑고)를 받는다고 해서 ‘살인 마스크’라는 표현을 썼고, 말만 나와도 이를 갈던…김성근 감독이 직접 치는 것으로 이슈가 됐지만, 사실 80년대 초중반생으로 야구를 한 이들은 감독이 아니면 코치들에게 살인 펑고를 안 받아본 이들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지옥을 체험하는 그런…참고로 유튜브에서 박재홍 위원이 김재박 감독에게 2002년이라고 말했지만, 2004년이다.』

 

펑고를 처음에는 곧잘(?) 받던 현대 선수는 사실 공을 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또한, 괴성을 지르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20-30분 정도가 지났을까? 김재박 감독은 펑고를 멈췄다. 그리고 펑고를 받던 선수가 마스크를 벗고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외치는 순간 놀랐고, 김재박 감독이 “찐마이(진만이)도 수고했어”라고 웃으면서 내뱉은 한마디에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살인 펑고를 받던 주인공은 포수 강귀태도 아니고 신인 혹은 유망주가 아니었다. 당시 프로 9년 차로 이미 팀의 중심이자 고참 반열에 올라선 소위 말해 ‘수비 귀신’이었던 박진만이었기 때문이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유입된 팬들, 혹은 최근 유입된 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유격수 수비를 두고 박진만에게 시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정도로 수비를 잘하는 박진만이 의도치 않았으나 공개적으로 ‘살인 펑고’를 받은 일은 어느덧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

 

화려하지만 너무 쉽게 처리해서 화려하지 않아 보였던 유격수. 김재박-류중일-이종범의 계보를 이은 대형 유격수.

 

그는 유니콘스의 ‘야전 사령관’ 아니 만두로 통했던 사나이 박진만이었다.

 

일각수 군단 최초의 유격수 탄생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 그러나 현실은 처참했다. 태평양은 절대 강팀이 아니었다. 1994년 준우승으로 돌풍을 일으켰지만, 삼미를 시작으로 청보에 이은 태평양까지 인천 연고팀은 ‘만년 약체’의 대명사였다. 겉으로는 ‘투수왕국’이라는 타이틀이 붙였지만,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투수는 몇몇 이름있는 선수라도 있었지만, 야수진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팀 간판타자 김경기, 1995년 3할 타자로 갑자기 튀어나온 3루수 권준헌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어쨌든 현대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트레이드에 나섰다. 하지만 1990년 중반은 트레이드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었다. 쉽게 대형 트레이드가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구체적으로 최상덕, 안병원, 김홍집 등이 카드가 됐고, 안병원과 송구홍의 트레이드가 진행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트레이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의 입성을 곱게 보지 않던 삼성이나 LG 같은 팀에서 선뜻 나설 일이 없었다. 어쨌든 현대는 많은 약점을 가지고 리그 첫 시즌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약점은 해결이 됐다.

 

고려대학교 진학이 확실시됐던 박진만이 방향을 틀어 현대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대와 프로야구 역사를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아마도 박진만이 대졸로 입단했다면 대형 선수가 되지 못했을지도…유급도 했는데 대학 생활이 순탄했을지도 의문이다. 물론 현대도 유격수 문제를 4년 이상 해결하지 못했을 수도…어쨌든 김재박 감독이 박진만을 스카우트 하기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공식 발표는 당시 체육 특기자 수능 커트 라인 40점에 미달해서 대학 진학을 할 수 없었던 것. 요즘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됐지만, 당시에는 프로와 대학 사이의 스카우트 전쟁은 살벌했다. 현대와 고려대 역시 박진만을 두고 살벌한 스카우트 전쟁을 치렀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계약금 2억 8천만 원, 연봉 2천만 원 등 총액 3억에 박진만은 유니콘스 호에 승선하게 됐다.

 

물론 프로 입단했다고 그에게 자동으로 자리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박진만이 입단 전까지만 해도 팀의 주전 유격수는 ‘전설의(?) 염경엽’이었다. 염경엽의 수비는 훌륭했다. 다만 방망이가 처참했다. 그래도 프로 짬밥을 무시할 수 없는 법. 출발은 염경엽-박진만의 경쟁 체제가 이루어졌다.

 

김재박 감독 역시 박진만의 기용에 여러 고민을 했다. 분명 훌륭한 기량과 재능이 있는 선수였지만 아마와 프로는 엄연히 다르기에 몇 차례 실수가 자신감 상실과 함께 피우지도 못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다. 그래서 초반 주전 염경엽, 백업 박진만을 구상하기도…하지만 1996시즌 개막전 전광판에는 염경엽이 아닌 박진만의 이름이 올라갔고, 이를 시작으로 9년간 박진만은 한 자리를 책임졌다.

그리고 김재박 감독의 선택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고졸 루키. 그러나 결코 프로 무대에서 주눅 들지 않았다. 아니 생각보다 더 좋은 활약을 했다. 당시 팀 내 입단 동기였던 괴물 루키 박재홍의 활약이 어마무시했기에 부각되지 않았을 뿐, 고졸 루키의 프로 데뷔 시즌은 매우 훌륭했다.

 

1996시즌 115경기 출장 361타수 102안타 홈런 6개 38타점 도루 11개로 타율 0.283를 기록했다. 다시 말하지만, 같은 팀에는 ‘괴물 신인’ 박재홍이 있었고, KBO를 호령하던 해태 이종범이 유격수로 있었기 때문에 저평가됐을 뿐이었다. 물론 22개의 실책을 기록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종범보다 나은 수비력을 가졌다고 평가받았다. 그리고 박진만은 단숨에 김재박-류중일-이종범을 잇는 대형 유격수로 꼽혔다.

 

수비 전문선수로 전락한 만두

 

성공적인 데뷔 시즌…그런데 이듬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선수가 됐다. 이제는 사라진 ‘2년생 징크스’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해야 할까? 발이 느리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김재박 감독은 그에게 많은 펑고를 쳐줬다. 여전히 더 성장해야 하는 선수였지만 수비는 이미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공격이었다. 1997년 박진만의 공격력은 문제가 아니라 거의 재앙 수준이었다. 흔한 말로 박진만이 9이닝을 다 소화하면 아웃카운트 3개는 최소한 상대에게 주고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물론 고질적인 무릎 부상도 부진의 요소가 될 수 있다. 또한, 아직 어린 선수였기에 상대에게 간파당한 것도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는 뭐…

 

박진만은 루키 시즌과 다르게 완전하게 바닥을 쳤다. 1997시즌 112경기를 뛰었으나 65안타 홈런 5개 29타점 도루 7개 타율은 무려(?) 0.185로 시즌을 마감했다. 어쩌면 ‘원조 물방망이’ 염경엽의 전철을 밟는 것이라는 불안감을 안겨줬다. 현대에는 염경엽을 필두(?)로 공격력이 비슷한 부류들이 많았다. 이근엽, 안명성 등 공격이 안 되는 내야수들이 많았고, 박진만도 그런 선수가 된 것이다. 데뷔 시즌보다 무려 1할이나 떨어진 타율. 굳이 세이버가 필요할까?

 

『다만 데뷔 시즌 홈런 6개를 기록했지만, 무려 1할이나 떨어진 두 번째 시즌에도 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안타 수 역시 절반으로 줄었으나 2루타는 11개나 기록했다. 즉 물방망이로 전락했으나 비교적 한 방은 있던 타자는 확실했다. 적어도 수비만 할줄 아는 현대 내야수 자원들과 비교하면 거포(?) 수준…참고로 필자는 세이버를 기준 삼는 것은 존중하지만, 올드 스쿨을 선호(?)하기에…』

 

1997시즌이 종료된 후 박진만은 고교 시절 부상으로 박은 왼쪽 무릎의 철심을 제거하며 그동안의 불편함을 덜게 됐다. 그리고 물방망이로 탈출을 선언했다. 하지만 쉽게 변하지는 못했다.

 

1998년 현대는 리그를 압도하는 시즌으로 인천 연고 역사상 사상 첫 정규리그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박진만은 1998시즌 123경기 출장 360타수 67안타 홈런 4개 33타점 도루 8개를 기록하며 타율 0.203을 기록했다. 직전 시즌에 비해 타율이 약간 상승했지만, 여전히 처참한 타격을 선보였다. 그나마 한국시리즈에서는 13타수 4안타 3타점 타율 0.308을 기록하며 정규시즌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기대치가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대형 유격수’의 꿈은 단순히 꿈으로 남는 것 같았다.

 

1998년 시즌이 끝난 후 박진만은 당시 타격 코치였던 김용철 코치와 함께 다시 타격폼 수정에 들어갔다. 그리고 앞선 두 시즌과 비교했을 때, 박진만은 완전(?) 다른 선수가 됐다. 1999시즌 128경기를 소화한 박진만은 104안타 홈런 3개 42타점 도루 5개를 기록하며 타율 0.263을 기록했다. 2할 6푼대 타자가 무슨 변화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박진만은 데뷔 시즌에 이어 3년 만에 100안타를 기록했다는 것.

 

하지만 이것은 박진만이 진짜 대형 만두로 변신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김용달 코치를 만나게 되면서 변신이 아닌 혁신을 이뤄냈다. 어쩌면 박진만의 야구는 이제부터 시작이 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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