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왕조/왕조의 주역들

국민 유격수 ‘만두’ 박진만 -2편(끝)-

by 특급용병 2026. 3. 27.
반응형

 

‘달 코치’와 만남, 그리고 대형 만두로…

 

새천년 현대에 김용달 타격 코치가 부임하면서 박진만은 이전 4시즌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1998년에 이어 2000시즌에도 현대는 리그를 압도하며 KBO리그 역사상 최초로 90승(최종 91승)을 돌파했다. 양대 리그라는 괴상한 제도로 인해 플레이오프를 치렀지만, 단일 리그 제도였다면 일찌감치 쉬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커리어 첫 우승 당시에 그는 아쉽고 초라한 시즌 성적을 남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2000년 박종호와 함께 KBO리그 역대 최고의 ‘키스톤 콤비’를 이루면서 메이저리그 수준의 수비 / 묘기 수준의 수비를 자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방망이에 짝대기가 붙어서 “물”이 아닌 “불”로 변했다.

 

2000시즌 박진만은 129경기 출장, 121안타 홈런 15개 58타점과 함께 타율 0.288을 기록했다. 이는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다. 드디어 잠재력이 터진 공격력에 수비는 완성됐다. 이제 경기 후반 혹은 승부처에서 대타로 교체되지 않아도 되는 선수가 됐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아니 진정으로 바라던 대형 유격수이자 거포형(?) 유격수로 거듭난 것이다.

 

박진만은 2000년 커리어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과 함께 생애 첫 “골든 글러브”도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한 번 터진 박진만은 변화를 멈추지 않았다. 2001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윙 궤적을 크게 가져가는 것으로 변화를 줬다. 또한, 오른발에 힘을 주고 있다가 테이크 백 동작 이후 왼발로 힘을 보내면서 힙턴이 이루어지면서 순간적인 폭발력을 만들어 내는 스윙으로 거포 아닌 거포(?)로 변신하게 됐다.

 

시즌이 시작되자 초반 홈런 부문에 낯선 이름이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박진만이었다. 비록 초반이었지만 1위를 달리는 시간도 있을 정도로 그의 장타력이 폭발했다. 물론 홈런왕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박진만은 2001시즌 122경기를 뛰며 115안타 22홈런 63타점 도루 9개 타율 0.300을 기록하며 생애 첫 3할 및 20홈런을 달성했다. 프로 입단 후 최고의 시즌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특히 김용달 코치와 홈런 20개 달성을 놓고 내기한 결과 박진만이 이겼다. 덤으로 2년 연속 골든 글러브 수상을 하면서 박진만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김용달 코치는 완성형 선수를 업그레이드시키는데 일가견이 있던 인물이었다. 물론 때로는 그의 고집과 철학이 악수가 될 때도 있지만, 적어도 현대에서 김용달 코치를 만난 완성형 선수 중에는 박종호-박진만은 물론 박경완, 심정수 심지어 외국인 선수 브룸바까지…확실하게 날개를 달았다. 다만 다들 거포형 스윙을 고집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멋진 부활 그리고 긴 인연의 끝…

 

2001년 프로 첫 20홈런을 기록했던 박진만은 다시 곤두박질쳤다. 다만 이전과 달랐던 것은 확실한 “파워 툴”을 장착했다는 것이다.

 

김용달 코치를 만나 파워 툴을 장착하게 됐지만 이는 장점이자 단점이 됐다. 왜냐하면 그의 거포 스윙에 뒷목을 잡는 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월드컵 시즌에 박진만은 126경기를 뛰며 88안타를 쳐내며 타율 0.219를 기록했다. 그러나 홈런 12개(57타점)와 2루타를 무려 24개나 기록했다. 이는 프로에서 20시즌 동안 세 번째로 많은 기록이었다. 참고로 박진만은 주력이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어쨌든 박진만은 긴 인연을 마무리하면서 선물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2002시즌의 부진을 뒤로 하고 다시 일어섰다.

 

2003년 현대는 통산 세 번째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과거와 달리 가세가 많이 기울었고 전력도 떨어진 상황. 하지만 박진만은 129경기를 뛰며 119안타 16홈런 48타점 타율 0.283을 기록했다. 또한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통산 세 번째 우승의 주역으로 기쁨을 맛봤다. 다만 골든 글러브는 유격수로 100타점을 달성한 홍세완에게로 돌아가며 생애 세 번째 영광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지만, 그 시절에는 말도 안 되는 기자들의 농간으로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홍세완의 사례도 그렇다. 그 이전에는 포수 최초로 20-20을 달성한 박경완이 있었지만, 우승 프리미엄으로 홍성흔이 받았다. 현대가 가세가 기울지 않았다면 우승 프리미엄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2004년에도 박진만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팀은 통산 네 번째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박진만은 시즌 중에 중심 타자들이 부진할 경우 4번 타자로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심지어 심정수-브룸바보다 더 역할을 잘 해낼 때도 있었다. 유격수임에도 말이다. 어쨌든 129경기 출장 124안타 홈런 17개 69타점 타율 0.286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다.

 

참고로 표면적인 기록은 떨어질지 몰라도 2000, 2001시즌 그 이상의 활약을 했던 시즌이었다.

 

그리고 현대는 삼성과 사상 초유의 9차전 혈투 끝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KBO리그에서 오직 해태만이 달성했던 2년 연속 통합 우승의 주인공이 됐다. 무엇보다도 박진만은 한국시리즈 타율이 0.129에 불과했지만 ‘박진만’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한국시리즈 4차전 7회 2사 1, 2루에서 김한수가 친 공이 중전 안타성으로 날아갔다. 빠지면 1점과 함께 배영수의 구위를 보면 삼성의 승리가 확정적이었다. 하지만 박진만은 넘어지면서 타구를 잡아냈다. 그뿐 아니라 커버를 들어오던 채종국에게 정확히 송구하며 실점을 막는 것을 넘어 팀의 패배를 막았다. 그리고 배영수의 퍼팩트 게임을 산산 조각냈다.

 

물론 9차전 8-6에서 강한 빗줄기에 평범한 내야 플라이를 떨어뜨리며 대역죄인이 될 뻔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어쨌든 4차전 팀의 패배를 막아준 환상적인 그 수비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4차전의 그 수비는 ‘현대 유니콘스’의 유니폼을 입고 안겨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현대는 사실상 모기업 없이 버티고 있었다. 2000년 이후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했고, 구단주가 떠나면서 현대는 더는 과거의 ‘돈대’가 아니었다. 그래도 잘 버텼지만, FA 시즌만 되면 늘 불안했다. 2004시즌 종료 후, 현대에는 심정수와 박진만이 FA를 선언했다. 아무도 심정수의 잔류는 생각지도 않았다.

 

다만 박진만은 달랐다. 팬들은 당연히 그랬지만, 김재박 감독도 박진만만큼은 포기 못 했다. 그러나 박진만의 프로 10번째 시즌은 현대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삼성 유니폼을 선택했다.

 

계약 직후 박진만은 구단 홈페이지에 인사 글을 남겼다. 직전 시즌 박종호와 너무나 다른 분위기였다. 팬들을 그에게 강도 높은 비난을 했다. 사실 그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잘못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비즈니스’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팬들은 더 화가 났고, 그가 원망스러운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현대 유니콘스 역사상 1호 유격수였던 박진만을 떠나보내야 했다. 있을 때는 몰랐지만 그가 떠나고 난 후 그의 빈 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밉기도 했고, 그립기도 했다.

 

현대를 떠난 박진만은 삼성에서 6시즌, SK에서 5시즌을 뛰고 은퇴했다. 이후 그는 지도자로 변신하며 2022년 삼성에서 퓨처스 감독을 맡다가 1군 감독 대행으로 승격됐다. 그리고 2023년 1군 감독으로 승격됐고, 여러 위기(?)도 있었지만 2026년 현재에도 박진만은 삼성을 지휘하고 있다.

 

현대 유니콘스의 유격수 그리고 국민 유격수 만두

 

박진만은 현대에서 9시즌을 뛰었다. 그리고 남은 11시즌을 삼성과 SK에서 뛰었다. 게다가 현대라는 구단이 사라지면서 색깔도 지워졌을 수 있다. 하지만 박진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유니폼은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현대 색이 강한 선수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박진만에 대해 여러 평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격수로서 故 하일성 위원의 “어려운 타구를 쉽게 처리하는 선수”라는 말이 가장 정확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래서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했다. 그는 물 흘러가는 것과 같은 수비를 자랑했던 선수였다. 이종범-류지현 등 동시에 뛰었던 유격수보다 스피드는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타구음과 함께 출발해서 먼저 가 있는 천부적인 감각으로 안정적인 수비를 자랑했다. 동시에 누구보다도 화려했던 수비를 보여줬던 인물이었다.

 

개인적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박진만보다 더 뛰어난 유격수 수비를 자랑하는 선수는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런 선수와 동시대를 살면서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너무도 행복한 일이었다. 2006년 WBC 이후 그에게는 ‘국민 유격수’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누구도 이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 유격수보다 ‘만두’ 박진만이 현대 팬들에게 더 깊이 남아 있지 않을지…

 

현대 유니콘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다시 현대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대 유니콘스 최초의 유격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는 ‘현대 박진만 선수’를 추억으로 간직한다. 대신에 그가 훌륭한 지도자로 오랜 기간 활약하기를 응원한다. 이왕이면 우승 감독이 되기를…

 

● 박진만

● 백넘버 : 7

● 1976년 11월 30일생

● 인천서화초-상인천중-인천고

● 우투우타/내야수

● 1996년 고졸우선지명 (현대)

● 소속팀 : 1996-2004 현대 -> 2005-2010 삼성 -> 2011-2015 SK

● 주요 경력

- 골든 글러브 5회(2000, 2001, 2004, 2006, 2007)

- 한국시리즈 우승 6회(1998, 2000, 2003, 2004, 2005, 2006)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