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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왕조/왕조의 주역들

현대 왕조의 ‘영원한 캡틴’ 이숭용 -1편-

by 특급용병 2026.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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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17시즌 동안 단 한 번도 타이틀을 따낸 적이 없었다. 아무도 그를 강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랬다.

 

프로 17시즌 중에 3할 시즌은 단 두 차례. 그렇다고 30홈런을 기록했느냐? 그렇지도 않다. 단 한 번도 20홈런을 기록해 본 적도 없었다. 분명 화려함은 없었다. 하지만 팀이 어려울 때 의리를 지킨 의리의 사나이였다. 또한, 팀이 필요로 할 때 그는 팀의 중심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팀이 아픔을 겪을 때도 끝까지 팀을 지킨 의리의 사나이.

 

그가 바로 현대 유니콘스의 영원한 캡틴이숭용이다.


 

인천팀 최초의 왼손 거포 탄생을 기대하며…

 

태평양은 1994년 드래프트 21번으로 왼손타자 이숭용을 선택했다. 당시 태평양은 이숭용에게 3할과 홈런 20개를 기대할 정도로 기대치가 매우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천 연고 역사에서 내세울 만한 좌타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냥 괜찮은 타자가 아니라 거포형 왼손타자의 출현은 돌핀스 군단을 흥분케 했다.

 

과거 우리 사회에서 왼손잡이는 흔하지 않았다. 이런 시대 상황과 삼--태 역사에서 대형 타자도 극히 드물었지만, 왼손타자는 아예 없었다고 해도어쨌든 이숭용은 입단 당시 계약금 5천만 원을 받았다. 당시 5천만 원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 기대했던 타자였다.

 

하지만 이숭용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그는 바로 태평양의 4번 타자 김경기였다. 정동진 감독은 이숭용을 살리기 위해 김경기와 함께 1루와 DH를 나눠서 기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물론 신인 이숭용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반면 팀 중심이던 김경기에게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경기의 벽, 그리고 프로의 벽이 너무 높았던 것일까? 그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입단 첫해였던 1994시즌 이숭용은 84경기에 출장해 48안타 3홈런 16타점 타율은 고작 0.229에 그쳤다. 특히 태평양은 1994년 돌풍을 일으키며 인천 야구의 전성기를 보냈다. 하지만 신인 이숭용은 팬들의 머릿속에 완전하게 지워져 있었다.

 

『신인 이숭용은 선배 김경기에게 찾아가 좋은 경쟁을 해보자고 당돌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만약 경쟁에서 지면 자신이 외야로 떠나겠다고…당시 강력한 위계질서를 자랑하는 스포츠계에서는 어쩌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선배 김경기에 의하면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매우 친해지게 됐다고 한다.』

 

1994년 준우승이라는 인천 야구의 쾌거(?)를 이룬 태평양. 하지만 곧바로 곤두박질쳤다. 주력 선수들의 줄부상 + 노쇠화로 태평양은 준우승 후유증을 톡톡히 치렀다. 그 결과 팀은 7위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이숭용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됐다. 팀의 4번 타자 김경기의 부상과 부진을 반복하자 이숭용에게 기회가 왔던 것. 그리고 김경기가 돌아왔을 때는 팀에서 꿈에(?) 그리던 4번과 5번 타자로 나란히 중심에서 뛰었다.

 

이숭용은 프로 두 번째 시즌인 1995시즌 83경기를 뛰며 68안타 홈런 11개 타율 0.255를 기록했다. 1990년대 당시 홈런 10개 이상을 기록했다면 충분히 장타력이 있는 타자로 기대해 볼 수 있던 시대였다. 분명 아쉬움은 있었지만, 입단 첫해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현대 왕조의 시작, 이숭용의 야구도 시작됐다

 

1996년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가 출범하면서 이숭용의 야구 인생도 새롭게 시작됐다.

 

유니콘스의 초대 사령탑 김재박 감독은 이숭용의 타격 재능을 살리고 공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를 외야로 이동시켰다. 이는 빈약한 팀 타선 강화를 위한 방법이었다. 어차피 1루에는 김경기가 버티고 있기에 이숭용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이숭용은 태평양 시절에 소유하던 어정쩡한 타격 폼을 수정했다. 타격 전에는 스탠스를 오픈한 상태에서 스트라이드할 때는 오른 볼이 클로즈됐다가 됐다가 다시 오픈하면서 타격하는 독특한 폼이었다. 이는 일본 오릭스의 이치로를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1995시즌 후 이숭용 역시 일본 오릭스 캠프에 참가하기도어쨌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프로 데뷔 3년차였던 1996시즌 이숭용은 붙박이 5번 타자124경기에 출장 104안타 12홈런 47타점 타율 0.280을 기록하며 현대 클린업트리오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리고 가을 무대에서는 부상 투혼을 하던 김경기를 대신해 4번 타자의 중책을 맡았다. 물론 그가 눈에 띄는 공격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중요할 때 한 방을 쳐주며 4번 타자로 역할을 다했다. 특히 한국시리즈 2차전 역투하던 조계현을 상대로 홈런을 뽑아내며 팀이 연장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과정을 만들어줬다.

 

어쨌든 3할을 친 시즌도 20홈런을 기록한 시즌도 아니었지만 이숭용은 성공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듬해 좀 더 강력한 타자가 되기 위해 이숭용은 외다리타법으로 타격 폼에 변화를 줬다. 그 결과 1997시즌 팀 타자들이 모두 부진에 빠져 있을 때 이숭용은 121경기에 출장 106안타 9홈런 61타점과 타율 0.311로 데뷔 첫 3할을 기록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정교함도 중요하지만, 팀은 그에게 장타를 원했다. 그런데 이숭용은 단 9개의 홈런에 그친 것이다.

 

이숭용은 장타력 높이기 위해 다시 한번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 대실패였다.

 

팀이 리그를 압도하는 시즌을 보냈던 1998시즌. 그의 앞에는 박재홍-쿨바가 있었다. 그럼에도 1998시즌 107경기를 뛴 이숭용은 101안타 10홈런 45타점 타율 0.278에 그쳤다. 이는 본인이 바라던 강력한 5번 타자와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 한국시리즈 6경기 동안 7안타 2홈런 5타점으로 타율 0.333을 기록하며 팀 통산 첫 통합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특히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중견수로 마지막 아웃 카운트 타구를 잡아냈다. 하지만 너무 기쁜 나머지 마지막 공을 관중석으로 날려버린 것어쨌든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시즌을 우승으로 달랬다.

 

다시 도전한 1999시즌. 아쉽게도 직전 시즌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절정의 타고투저아니 타신투병시즌임에도 불구하고 이숭용은 109경기를 뛰었다. 하지만 81안타 14홈런 39타점 타율 0.264에 그쳤다. 풀타임으로 뛴 시즌 가운데 가장 저조했던 시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주 폭망한 시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지만 타신투병시즌임을 고려하면 폭망한 시즌이 맞았다.

 

『거의 매년 타격폼에 변화를 주며 도약을 꿈꿨으나 결과는 늘 2% 부족했다. 이것은 이숭용의 단점이기도 했지만 큰 장점이 되기도 했다. 부정적으로 보면 폭발력이 없었고, 긍정적으로 보면 꾸준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소위 뽀록이라도 한 시즌 정도는 터졌으면 했지만, 그것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1997년 이숭용의 모습이 커리어 하이가 될 줄은 몰랐다. 많이 노력하는 선수였고, 하드웨어도 좋은 선수였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새천년 현대는 다시 리그를 지배하는 몬스터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이숭용은 이상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2000년 현대의 약점은 외국인 선수였고, ‘이숭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숭용은 104경기를 뛰며 80안타 15홈런 50타점 타율 0.285를 기록한 것이다. 분명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역시나 타신투병시즌이 계속 되었다는 것. 게다가 당시 현대 타선은 초호화 군단이었다. 그런데 4or 5번 타자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외인 카드의 실패로 이숭용은 외야에서 1루로 다시 돌아왔고, 개인 성적보다 통산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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