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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용병/한화 이글스

추억의 용병 01 - ‘미국산 선풍기’ 마이크 부시

by 특급용병 2023.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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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해태와 삼성과 함께 리그를 이끌었던 팀이었다. 누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철벽 마운드와 여전히 추억으로 남아 있는 다이너마이트타선까지비록 해태의 벽을 넘지 못해서 한국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던 팀이기도 하지만 한때 프로야구의 중심에 있던 강팀이었다. 그러나 팀의 주력 선수들의 은퇴와 노쇠화가 진행되면서 90년대 중반 이후 팀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팀의 간판이 빙그레에서 한화로 바뀌면서 점점 힘을 쓰지 못하는 팀이 됐다. 결국 돌파구를 찾던 한화는 1998년 도입된 외국인 선수 제도를 통해 과거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 팀이 그랬던 것처럼 한화도 외국인 선수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단순한 명성(?)에만 의존했을 뿐이다.

 

역사적인 KBO 외국인 선수 전체 1순위는 현대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화는 두 번째당연히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현대에게 쏠렸다. 이유는 단 하나! KBO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선수였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가 거포 3루수를 선택하는 것은 거의 정설(?)처럼 여겨졌다. 한화는 이런 현대의 움직임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현대가 원하는 선수를 한화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화에게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 드래프트 당일 현대는 거포 3루수가 아닌 우완 투수 조 스트롱을 지명한 것이다. 한화는 환호를 부르며 팀 역사상 1호 외국인 선수를 호명했다. “마이크 부시이 선택으로 한화는 외국인 드래프트의 진정한 승자로 꼽혔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1998시즌 프로야구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다음에 이 썰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밝혀보겠다).

 

마이크 부시는 트라이아웃 당시 자칫 중간에 퇴출 당할 수도 있었다. 부시를 포함해 일부 선수들이 평가전 출전을 거부하면서 태업 아닌 태업을 했기 때문이다. 이에 8개 구단은 평가전에 나서지 않는 선수를 퇴출하겠다고 초강수를 둔 것이다. 그러자 부상 핑계를 대던 부시도 5번째 평가전에 출전했다. 그리고 130m의 초대형 홈런을 기록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어쨌든 당시 우리나라 언론은 부시를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소개했다. 하지만 이는 사기 수준의 완벽한 구라(?)였다.

 

부시는 1990년 드래프트 4라운드에서 LA 다저스에 지명을 받았다. 루키에서 한 단계씩 레벨을 올리던 그는 1995LA 다저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데뷔했다. 그리고 2시즌 동안 51경기를 뛰며 타율 0.220 홈런 723타점을 기록했다. 이후 부시는 빅리그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통산 665경기를 뛰면서 626안타, 126홈런 394타점을 올린 강타자였다. 당시 한국 수준을 고려하면 충분히 기대치를 높여 볼 만했다.

 

그런데 지명 후 한화 입단까지는 매우 험난했다. 한화는 줄곧 연봉 20만 달러 이상을 요구했다. 만약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당시 메이저리그 신생 구단으로 창단한 템파베이와 계약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현대와 약속했던 제프 볼을 비롯해 수준급의 선수들이 템파베이와 애리조나의 문을 노크하려고 캠프에 불참하거나 도중에 떠났다) 그러나 어쨌든 부시의 최종 종착지는 한화였다.

 

 

그런데 한화 유니폼을 입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부시는 연봉 20만 달러 이상을 요구했고, 만약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메이저리그 신생 구단이었던 템파베이와 계약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부시의 최종 종착지는 한화 이글스였다.

 

연봉 105천 달러 입단 보너스 1만 달러 등 총 115천 달러. 그런데 과연 믿을 수는

 

그렇게 한화는 과거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꿈을 가지고 1998시즌을 시작했다.

 

부시는 스프링캠프에서 프리배팅 10개 중 7-8개를 담장 밖으로 넘겼다. 밀어서 홈런을 만드는 것도 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팀의 베테랑이었던 장종훈은 KBO리그에서 50홈런도 가능할 것이라고 그를 평가했다. 게다가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유연한 수비를 자랑무릎 부상 의혹에 대해서 확실한(?) 답변을 해주기도 했다.

 

1998시즌 개막 2연전에서 부시는 참혹한 출발을 했다. 4연속 삼진과 함께 8타수 1안타에 그치며 혹평을 받았던 것. 물론 이런 평가를 금방 민망(?)하게 만들었다. 부시는 415LG와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시작으로 17일까지 3경기 연속 홈런 및 4개의 홈런을 기록. 개막 첫 주간 MVP에 선정됐다. 초반 페이스라면 50홈런도 꿈이 아니었다.

 

그런데 429일 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빠져나가면서 50홈런의 꿈은 확실하게 깨졌다. 그리고 한화도 점점 추락하기 시작했다. 부시가 있을 때 한화는 815패를 기록했으나 부상 후 316패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물론 부시는 금방 복귀했지만 이후 부시 효과는 없었다. 시즌 초반 활활 타오르던 방망이는 완전하게 얼어버렸고, 공포의 타자가 아닌 변화구에 대책 없는 모습만 나타났을 뿐이다.

 

부시는 전반기 45경기에서 타율 0.2238홈런 16타점에 그쳤다. 후반기 부활을 기대했지만 그러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무릎 부상 후유증까지 발생하면서 그는 팀에 계륵과 같은 존재가 됐다. 결국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 리그에 상륙했지만 부시는 1998시즌 76경기 0.213의 타율과 10홈런 28타점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한국을 떠나야 했다. 특히 고작 16개의 볼넷을 얻어내는 동안 무려 81개의 삼진을 당하며 변화구에 대책이 없는 타자라는 것이 확실하게 입증됐다.

 

한국을 떠난 그는 독립리그로 돌아가 199921, 200019개의 홈런을 가동하며 마이너리그용(?) 선수임을 증명했고, 2001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어쩌면 한화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선수일 수도그러나 서로가 너무나 몰랐던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향후 부시보다 더한 인간들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왜냐하면 부시의 한국 생활도 나름 힘겨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2M에 가까운 초장신(?)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맞는 침대를 구하지 못했다. 이건 뭐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괴로웠을지당시 이런 대우는 어쩔 수 없는 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단이 너무 무심했던 것이다. 특히 무릎이 좋지 않은 선수라는 점을 고려하면 좀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했었다.

 

또한, 85경기 이상 뛰지 못할 시, 연봉 일부를 받지 못하는 조항도 계약서에 있었다. 분명 먹튀, 공갈포로 곱지 않았던 인물이지만 감독은 기용하고 싶어도 기용할 수 없었다. 물론 증거(?)는 없으나 출전을 저지하는 구단의 무언의 압박(?)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먹튀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원래 그런 선수였는데(부시 입장에서는 그랬다는 것이다.)

 

이제는 추억으로 웃으며(?) 말 할 수 있지만 만약 현대가 그를 영입했다면 1998시즌 한국 프로야구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한화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 한화가 부시에 대해 정보가 있었다면 과연 그들은 누구를 선택했을까? 롯데의 브래디? 해태의 숀 헤어?

 

어쨌든 50홈런과 함께 괴력의 부시를 기대했지만, 그에게서는 괴력이 아닌 미국산 선풍기스윙을 원 없이 봤고, 괴력은 우즈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한화는 아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팬의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역사이자 그 중심에 한화와 부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는 한화와 KBO리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도 말이다.

 

● Michael Anthony Busch - 한국명 : 마이크 부시

● 1968년 07월 7일생

● 우투우타/내야수

● 1990년 ML 드래프트 4라운드 LAD 지명

● 1995년 8월 30일 ML데뷔

● 주요 경력 : 1995-1996 LAD -> 1998 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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