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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왕조/왕조의 주역들

현대 왕조의 ‘영원한 에이스’ 정민태 -3편(끝)-

by 특급용병 2026.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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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 입성과 시련, 그리고 퇴단…

 

2000년 시즌 후 현대는 약속대로 정민태의 해외 진출을 허락했다. 그리고 일본의 복수 구단이 정민태에게 관심이 있음을 밝혔다. 현대와 자매결연 팀 오릭스 그리고 주니치도 거론되는 팀이었다. 언론에서는 오릭스가 유력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정민태의 최종 도착지는 일본 최고의 명문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였다.

 

이에 대해 한국 언론은 대놓고 정민태를 비난했다. 당시 요미우리에는 조성민-정민철 등 한국 투수들이 있었다. 게다가 모 선수는 인터뷰를 통해 불편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요미우리는 정민태가 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당시 현대는 ‘왕자의 난’으로 인해 계열사 분리로 모기업이 휘청했었다. 따라서 현대는 많은 ‘트레이드 머니’를 주는 팀을 선택했던 것. 정민태 본인도 훗날 밝혔지만 일본 구단 선택은 본인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내부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나 안티 팬들은 정민태의 일본 팀이 요미우리라는 것과 현대로 유턴했을 때 거액의 연봉에 대해 많은 비난을 했다. 하지만 정민태가 비난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어쨌든 큰 꿈을 안고 입성한 요미우리. 하지만 그의 일본 생활은 태평양 시절보다 더 험난했다고 해야 할까? 1군 감독과 문제도 없었다. 물론 전성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뛸 수 있었다. 실제로 불펜으로 나와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정민태. 그러나 1군 투수 코치 ‘카토리’는 정민태에게 악몽과 같은 일본 생활을 선사했다.

 

감독의 요청에도 카토리 코치는 “준비가 안 됐다.”라고 둘러대며 1군에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불펜으로 연속 호투하다가 한번 무너졌다는 이유로 혹은 호투했음에도 다음 날 2군으로 가기도…심지어 카토리 코치는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에서 만난 삼성 선수단에 찾아가 “정민태를 박살 내줄 것”을 요구하면서 “버릇을 고쳐놓겠다.”라는 험담을 할 정도였다. 삼성이 한국 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정민태의 일본 생활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당시 정민태의 실패를 놓고 많은 이들이 비난했다. 지금도 비난을 넘어 조롱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비난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현대가 비인기 구단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도 있었다.

 

어쨌든 분명 한국인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코치와 상극이라 어려운 생활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편에서도 언급했지만 2000시즌 이미 그의 구위는 현대에서 5시즌 가운데 최악이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당시 기준으로 KBO리그보다 한 수가 아니라 두 세수 위에 있는 일본에서 성공을 기대하는 것 자체는 무리였을 것이다.

 

다만 가토리 코치가 정민태를 죽도록 싫어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요미우리가 아닌 다른 팀이라면 그의 일본 생활은 달라졌을 수도…뭐 이미 지난 일이지만…』

 

정민태는 요미우리에서 2시즌을 동안 27경기 2승 1패 38.2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6.28을 기록하고 일본 생활을 마무리했다.

 

현대 유니콘스로 복귀와 마지막 불꽃

 

일본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정민태를 향한 언론과 여론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한 마디로 정민태는 “끝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재기가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게다가 연고지도 팬도 없는(?) 현대가 잘 나가는 것이 배 아픈 이들은 조롱했다. 하지만 정민태는 독설을 쏟아내는 이들의 생각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분명 이전의 강력한 구위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래도 정민태는 정민태였다.

 

2003시즌 정민태는 바워스-김수경 등과 마운드를 이끌었다. 그리고 정민태는 일본 진출 이전부터 이어오던 선발 연승 기록을 이어가며 ‘언론 표현’으로는 ‘세계 최초 선발 21연승’을 달성했다.

 

『이때도 웃기는 의견이 많았다. OB 박철순의 단일시즌 최다 연승이었던 22연승과 비교하면서 정민태의 기록은 단일시즌에 달성되지 않아서 ‘기록이 아니다.’라고 하던 이들도 있었다. 또한,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이 부끄럽다고 조롱했다. 박철순의 22연승과 정민태의 연승 자체는 다른 것이다. 게다가 누구도 박철순과 정민태를 비교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게다가 세계 기록이라고 하지만…필자는 프로리그에서 ‘세계 신기록 or 최초’ 이런 것은 의미 없다고 본다. 리그 수준과 별개로 리그가 다른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쨌든 당시에 정말 이상한 사람들 많았다.』

 

많은 이들이 조롱하고 마치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들의 염원(?)을 뒤로하고 정민태는 복귀 시즌인 2003시즌 29경기 등판 17승 2패 177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점 3.31을 기록. 프로 통산 세 번째 다승왕과 첫 번째 승률왕을 따냈다.

 

그리고 더 진짜 시즌이 있었으니 2003시즌 한국시리즈였다.

 

한국시리즈에서 정민태는 전성기 모습에 버금가는 완벽한 에이스 모드였다. 정민태는 시리즈 4승 중 무려 3승을 혼자 따냈다. 1, 4, 7차전 선발로 등판한 정민태는 마지막 경기였던 7차전에서는 무려 완봉승을 거두며 21.1이닝 동안 단 4실점으로 3승 평균자책점 1.69를 기록했다. 특히 7차전은 허벅지에 피가 뭉치자, 바늘로 찔러가며 쌀쌀한 가을날에도 불구하고 완투하며 완봉승을 따냈다. 이런 그의 투혼으로 현대는 통산 세 번째 우승을 달성했고 정민태는 1998년에 이어 두 번째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것은 정민태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리고 2003년 현대의 우승은 정민태가 모든 걸 쏟아부어 만든 작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대와 운명을 같이한 에이스

 

한국 복귀 첫해 우승을 선물한 정민태는 2004년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연봉 7억원(7억 4천에 계약) 시대를 열었다.

 

당시 현대 팬들은 가만히 있는데 다른 팀 팬들이 상당한 비난과 조롱을 했다. 게다가 언론에서도 정민태를 비난했다. 강조하지만 비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분명 사정이 있었다. 팀내 예비 FA 모 선수는 보상금 때문에 대폭 인상을 했으나 정민태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 정민태가 훗날 밝혔지만 본인이 부진해서 연봉 삭감할 때는 항상 구단에 수긍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우승 시켰는데 많이 받는 것이 욕먹을 일인가? 아무튼…』

 

2004시즌 정민태는 마치 2000시즌 초반을 재현하는 것 같았다. 정민태-김수경-피어리의 트로이카가 4월을 너무 잘 던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4월의 마지막 등판을 시작으로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당시 잠실에서 두산과 경기에서 초반에 난타당하며 조기 강판 됐다. 그런데 문제는 좀처럼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4회까지 좋은 피칭을 하다가 5회가 되면 갑자기 난타당하며 4-5실점을 기본으로 하는 투수가 된 것이다.

구속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악몽과 같았던 2004시즌 그는 28경기를 등판했다. 그리고 평균자책점 5.00과 7승 14패를 기록했다. 그래도 165.2이닝을 소화했으나 이름과 연봉에 어울리지 않은 성적이었다. 그래도 한국시리즈에서는 해줄 것이라고 기대했건만…

 

2005시즌 그의 연봉은 대폭 삭감됐다. 그리고 부활을 다짐했다. 그러나 정민태의 불꽃은 이미 꺼졌다. 시즌 중 타구에 맞으며 부상으로 전력에서 제외됐다. 여름에 다시 1군에 복귀했지만, 사실상 아무런 의미 없는 시즌이었다. 2005시즌 단 8경기에 등판해 승리 없이 3패 26.2이닝 4.7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조기에 시즌을 마감하고 수술대에 올랐다.

 

어쩌면 2003시즌 한국시리즈는 34살의 노장 투수에게는 마지막 불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련도 버렸어야 했을지도…정민태는 수술까지 하면서 부활을 노렸다. 하지만 정민태는 끝내 재기하지 못했다.

 

2006시즌 단 1경기에 나와 2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점 4.50을 기록했다. 또한 현대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7시즌에도 7경기 19.2이닝을 책임지며 승리 없이 6패 평균자책점 12.81로 팀의 운명과 함께 그 역시도 마운드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7시즌을 끝으로 현대가 해체된 가운데 ‘센테니얼’이 창단했다. 하지만 박노준 당시 단장은 현대 출신 베테랑들과 ‘파워 게임’을 하면서 본보기로 정민태를 방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박 단장의 노림수는 물거품이 됐다. 정민태가 KIA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통 분담’을 내세우며 선수들의 연봉을 후려치면서 쫓아낼 생각을 했던 센테니얼은 한 방 먹은 셈이었다.

 

물론 정민태가 KIA 유니폼을 입고 보란 듯이 재기한 것은 아니었다. 2008시즌 1군에서 단 1경기에 나왔고 3.2이닝만 던지며 1패 14.73이라는 평균자책점을 남기고 2군에 갔고 그해 7월 은퇴를 선언했다.

 

2008시즌 막판 히어로즈가 이광환 감독을 경질하고 김시진 감독을 2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이때 정민태도 히어로즈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후 롯데를 거쳐 한화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한때 많은 비난을 받았던 그는 한화에서 송은범을 살려내면서(?) 재평가받기도 했다.

 

2024년에는 현대 왕조를 구축했던 후배 박진만이 사령탑으로 있는 삼성 투수 코치로 부임했고, 삼성 팬들에게 평은 나쁘지 않다. 다만 전반기가 끝나고 2군으로 좌천됐다. 과연 투수 코치가 무슨 책임이 있는지…그리고 2025시즌을 끝으로 삼성에서 지도자 생활을 마감하게 됐다.

 

지도자로 성공을 기대하며…

 

“현대가 없어진 날, 내 야구 인생도 끝났다.”

 

센테니얼의 창단 후, 결별하면서 남긴 그의 말이다.

 

분명 현대의 정민태, 정민태의 현대였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현대가 계속 존재했다면 그는 팀 역사에서 첫 번째로 영구결번 선수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현대는 추억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어쨌든 현역 선수 정민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이제는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보내고 있다. 물론 한 때는 비난만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그에게는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고 가야 할 길이 멀다. 자신의 힘들었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좋은 후진을 양성하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길 기대한다.

 

현대라는 팀과 함께 많은 추억을 안겨준 에이스. 그러나 연고지도 없고, 팬이 없어서 지켜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추억이지만 필자의 마음에는 여전히 현대 유니콘스가 최고의 팀이고, 최고의 에이스 정민태이다.

 

2005년경 사석에서 만났을 때, 그는 “꼭 부활해서 다시 보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의 약속은 유효하지 않게 됐다. 다시는 선수로 마운드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수로 약속을 지키지 못해도 코치 정민태, 감독 정민태로 정상에 우뚝 설 수 있기를 항상 기대하며 응원한다.

 

 

 

● 정민태

● 1970년 3월 1일생

● 숭의초-동산중-동산고-한양대

● 우완투수

● 1992년 신인 드래프트 1차 지명(태평양)

● 소속팀 : 1992-1995 태평양 -> 1996-2000 현대 -> 2001-2002 요미우리 -> 2003-2007 현대 -> 2008 KIA

● 주요 경력

- 골든글러브 3회(1998, 1999, 2003)

- 다승왕 3회(1999, 2000, 2003)

- 승률왕 1회(2003)

- 한국시리즈 MVP 2회(1998, 2003)

- 한국시리즈 우승 4회(1998, 2000, 2003, 2004)

- 포스트 시즌 통산 최다승 1위 : 1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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