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왕조의 최초의 에이스 탄생
1995시즌이 끝나고 정민태는 오릭스 가을 캠프에 참가하게 됐다. 그리고 일명 ‘아리랑볼’로 불리는 ‘슬로커브’를 장착했다. 이는 단순히 구종 장착을 넘어 힘으로만 밀어붙이던 스타일에서 완급 조절이라는 기술을 장착하는 계기가 됐다.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 첫해였던 1996년 정민태는 위재영과 원-투 펀치를 이루면서 현대 마운드를 책임졌다. 그리고 정민태는 박재홍과 함께 팀 창단 첫해 돌풍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눈부신 성적을 남겼다.
1996시즌 30경기 출장 210.1이닝 15승 9패 평균자책점 2.44를 기록하며 프로 데뷔 첫 두 자리 승리와 함께 200이닝을 돌파했다. 이는 명실상부한 현대 ‘최초의 에이스’로 출발하는 시즌이었다.
정민태의 눈부신 활약은 가을 무대에서도 계속됐다. 아니 어쩌면 ‘Big Game Pitcher’를 증명했다.
『다시 말하면 태평양 시절이었던 1994년 가을무대 퍼포먼스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현대는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해 한화를 만났다. 이때 정민태는 2경기 1승 1세이브로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그리고 쌍방울과의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에 등판해 단 2실점만 하면서 1세이브를 기록.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참고로 당시 현대는 KBO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서 2연패 후 3연승으로 리버스 스윕을 달성했다).
마지막 관문이었던 해태와 한국시리즈, 현대 마운드에는 정민태밖에 없었다. 해태 천적 위재영이 1차전 철저하게 무너지면서 정민태는 2차전을 책임져야만 했다. 비록 정민태는 승리 투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조계현과 명품 투수전을 펼치면서 무서운(?) 해태 타선을 철저하게 잠재웠다. 2승 2패로 균형을 맞춘 5차전. 시리즈 두 번째 선발 등판을 했다. 물론 나름 좋은 피칭을 했다. 다만 승리와 인연이 없었고, 6차전에서 또다시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현대가 치른 가을 무대 13경기 중 정민태는 7경기 등판(선발 5경기 / 불펜 2경기) 35.1이닝을 책임지며 1승 1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1.53을 기록하며 정민태 만큼은 무적의 시리즈였다.
1997시즌 준우승 후유증(?)을 겪은 현대는 주력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으로 7위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정민태는 달랐다. 홀로 외롭게 싸웠던 시즌이었다. 1997시즌 31경기 출장 무려 219이닝을 소화하며 13승 13패 평균자책점 3.33을 기록했다. 특히 8번의 완투로 본인의 최대 완투를 기록한 시즌이었다. 13패를 당한 시즌이었지만, 만약 팀이 정상적으로만 돌아갔어도 1996시즌보다 더 많은 승리를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더 견고해진 모습이었다.
첫 우승 그리고 20세기 마지막 20승 투수
현대에서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한 1998시즌은 정민태 커리어에 있어서 최고의 구위를 자랑하던 시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투수 정민태의 최전성기 시즌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사석에서 물어본 결과 본인도 1998년이 기량이 정점에 올라선 시기였다고 밝혔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그가 시즌 9패를 당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1998시즌 정민태는 28경기에 등판 200.2이닝을 책임지며 17승 9패 평균자책점 2.83을 기록하며 다승 2위 탈삼진 5위 평균자책점 7위 최다이닝 1위를 달성했다. 참고로 다승은 1승 차이로 김용수가 타이틀 홀더가 됐지만 사실 만들어 준 18승이라는 것. 그래도 1위임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200.2이닝은 은 2위 박명환이 187이닝을 던졌기 때문에 압도적인 이닝이터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 찬란한 성적표는 정민태는 이제 현대 에이스를 넘어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우뚝 섰다.
팀은 리그를 압도하는 시즌을 보내면 인천 연고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그리고 정민태는 다승왕보다 더 큰 것을 이루게 된다.
LG와 만난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김용수와 맞대결을 펼쳤다. 스코어 11-2 현대의 승.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경기였다. 정민태는 8이닝 동안 단 2개의 안타를 허용하며 볼넷 1개, 삼진 8개를 잡아내며 무실점으로 생애 첫 한국시리즈 승리 투수가 됐다.
2승 1패로 시리즈를 리드하던 4차전 정민태는 다시 등판했다. 역시나 상대는 김용수였다. 이번에도 웃는 쪽은 정민태와 현대였다. 정민태는 8이닝 5피안타 1볼넷 무려 12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1실점. 팀의 7-1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된 6차전 마지막 투수로 등판해 0.2이닝을 막아냈다.
그 결과 한국시리즈 3경기 17.2이닝 2승 평균자책점 0.51. 그야말로 ‘언터처블’이었다. 비록 다승왕은 놓쳤지만 팀 창단 첫 우승과 한국시리즈 MVP 그리고 생애 첫 골든 글러브를 따내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정민태에게 1998시즌은 구위가 정점에 올라선 시즌이었다면 1999시즌은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시즌이었다.

1999년은 초절정의 ‘타고투저’ 시즌이었다. 쉽게 말해 ‘탱탱볼 시대’였다. 한 시즌 홈런 10개를 칠까 말까 하던 타자들이 20-30개를 우습게 치는 시즌이었다. 선발 투수는 리그에서 찾아봐도 없던 그런 시즌이었다. 오히려 진필중-임창용-구대성 등 마무리 투수라고 하지만 중무리에 가까운 투수들의 시대였을 정도였다. 다시 말해서 불펜 투수들이 갈리던 그런 시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민태가 더 위대했던 시즌이었다. 전반기만 하더라도 그의 최종 승수는 20승이 아닌 20승 +@로 예상은 물론 충분히 가능할 정도로 좋은 페이스였다. 다만 그러나 후반기 허벅지 부상과 타선의 침묵으로 20승 초과 달성에는 실패한 것. 무엇보다도 말도 안 되는 ‘양대 리그’라는 어이없는 제도로 인해 마무리 투수로 알바(?)를 뛴 것도 20승 초과 달성 실패의 이유였다.
1999시즌 33경기 등판 무려 230.2이닝을 소화하며 20승 7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2.54를 기록했다. 사실상 “나만 선발 투수다.”를 연출했던 시즌임은 물론 1995년 이상훈 이후 4년 만에 선발 투수로 20승 달성과 20세기 마지막 20승 투수로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프로 첫 다승왕과 함께 2년 연속 골든 글러브 수상을 하면 한국 최고의 투수로 우뚝 섰다. 만약 이승엽이 우즈가 세운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갈아치우지 않았다면 정민태가 MVP를 받았을 것이다.
『당시 1승이 구원승이었지만 무려 6이닝을 던져서 따낸 승리였다. 물론 순수한 선발 20승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깎아내릴 정도는 아니다. 만약 정민태의 20승을 평가절하한다면 1995년 이상훈 이전의 20승은…그러나 과거의 기록이라고…현대의 눈으로 무조건 평가절하하는 일은 없었으면…』
리그 MVP를 제외하고는 이룰 것을 다 이룬 정민태는 시즌 후 해외 진출을 선언했다. 다만 당시 KBO와 구단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 당시에는 구단이 막으면 방법이 없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구단이 아닌 KBO가 막았다. 이는 훗날 정민태 본인이 밝혔지만 KBO에서 막았고, 본인은 집안 사정으로 해외 진출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어쨌든 현대는 2000년 우승한다면 반드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의 해외 진출은 1년 뒤로 미뤄졌다.
새천년 현대는 1998시즌보다 더 무서운 팀이었다. 특히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90승을 달성했고, 최종 성적 91승으로 KBO리그 한 시즌 최다승을 달성. 압도적인 시즌을 보냈다. 냉정히 말해서 마음만 먹었으면 100승도 가능했을지도…
정민태는 임선동-김수경과 함께 ‘황금 트로이카’를 구축하며 2000시즌 29경기 18승 8패 평균자책점 3.48과 207이닝을 소화하며 최동원 이후 역대 두 번째로 5년 연속 200이닝을 달성한 투수가 됐다. 또한, 사실 마음 먹고 밀어주기를 했다면 정민태의 2년 연속 20승이 가능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김수경-임선동도 20승이 가능했을 것. 하지만 시즌 막판 임선동-김수경이 다승왕을 차지할 수 있던 유리한 고지였으나 실패하면서 마지막 기회를 특정 선수에게 특혜가 아닌 공평하게 한 경기씩 돌아갔다. 그 결과 정민태는 다승 공동 1위로 통산 두 번째 다승왕이 됐다.
『지금도 이런 팬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는 비난은 김재박 감독이 다승왕을 만들어 주기 위해 편법을 썼다고 하는 이들이었다. 몰아주기를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기회를 공평하게 줬을 뿐이다. 다만 3명이 17승인 상황에서 마지막 선발 등판에서 모두 승리를 챙겼다. 과연 이것이 승리 만들어 주기 혹은 다승왕 밀어주기랑 무슨 상관인가?』
2000시즌도 말도 안 되는 양대 리그 제도가 시행됐다. 현대는 압도적인 시즌을 보냈음에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삼성과 만난 플레이오프에서 정민태는 2승을 따냈다. 그리고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정민태는 2경기에 등판했다. 그리고 1승을 따냈다. 하지만 구위는 정상적이지 못했다. 이미 2000시즌은 정점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그런 시즌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민태의 구위는 1998시즌이 정점이었다. 그 후에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통산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도 경험한 정민태는 골든 글러브 후보에는 올랐지만, 후배를 위해 사실상 사퇴(?) 선언을 했다. 어차피 본인은 받았었고, 일본 진출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민태는 현대에서 최고의 5시즌을 보내고 2000시즌 후 한국을 떠나 새로운 무대로 떠나게 된다. (3편에서 계속…)
사진 : 현대 유니콘스 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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